본문
20: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 12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20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1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2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23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24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5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6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욥 20:1-29)
원칙에서 밀려 나와 인격자에게로
본문에서 소발은 악인이 그 삼킨 재물을 토하고 뱀의 혀에 죽고 가산이 멸하여 없어진다는 등의 표현으로 악인은 즐거움과 결실이 없는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원칙, 곧 인과응보에 근거한 논리를 펴서 ‘네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결국 너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하는 데로 욥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인과응보라는 원칙을 세운 ‘인격적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선포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는 말씀에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은 어떤 개념이 아닙니다. 원칙이 아니며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이 만든 성실함입니다. 인격이 원칙을 붙잡고 있다면, 원칙은 유익을 위해서만 효력을 발휘하고 손해를 위해서는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원칙이 유익을 위하여 힘을 발휘한다는 뜻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다 어느 쪽으로 쓰셨습니까?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시고, 우리가 책임 있는 삶을 살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하여 인간의 책임과 자유를 강조하십니다.
욥은 지금 그 원칙 밖에 서 있습니다. 그가 원해서도 아니고 도를 깨쳐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욥을 그 자리로 밀어내신 것입니다.
사탄이 의도했던 것은 욥의 무너짐과 배신이었지만, 정작 욥은 그것을 깨고 어디로 나옵니까? 경직된 법칙이 아니라 인격자의 손에 쥐어진 법칙을 이해하는 자리로 나오게 됩니다.
이해관계보다 하나님의 옳으심
요나는 살려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욘 2:5-6) 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외적 고통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고통 속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미련함, 비겁함, 하나님의 크심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함, 완악함과 같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실체를 본 것입니다. 그곳에서 요나가 돌이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살펴봅시다.
요나는 애국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가라는 이름을 빼면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요나가 바로 거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릴지라도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을 못 버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 앞에 항복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을 내 개인적인 이해득실에 묶을 수 없습니다’ 하는 데까지 간 것입니다.
법보다 관계 속에 있는 인생
믿음이라는 것은 인과응보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윤리와 도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며 사회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잘 따져 보면 우리는 법 속에 있기보다 관계 속에 있습니다.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원수랑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은 초법적인 관계입니다. 벗어날 수 없고 끝없이 책임져야 하는 기쁜 짐입니다. 가족이 잘못을 한다고 해서 갈라서고 따질 수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짐이고, 또 죽을 때까지 유일한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면서 손주 없이 무슨 낙으로 사나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날에 따라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매초 단위로 교차합니다. 그 이상 기쁠 수가 없고 그 이상 짐일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사는 것입니다.
그 법이 인격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을 모르면, 즉 그 법을 만드시고 적용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불안하고 힘들어질 뿐 아니라 누군가를 그 법칙으로 붙잡아 자기를 편하게 하는 것밖에 모르게 됩니다. 세 친구들은 옳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적당하게 쓰지 않는 친구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평하심에 대하여, 동시에 법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하여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원수는 없다
기도하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안 하는 것을 지적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됩니다.
원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원수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군가 내 복을 가로채고 나를 넘어뜨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관계와 연약함이 만든 분노만 있을 뿐이지 원수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합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희는 저희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이 잘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넘어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고 있는 것을 저들이 모르고 있다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원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합니다. 원한을 상대방에게 풀지 말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겁날 것이 없구나’ 하는 고백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욥은 아직 힘든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기이한 인도하심 속에 더 큰 하나님,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모릅니다. 친구들은 욥을 정죄하고 훈계하여 욥이 어디에서 어디로 나가고 있는가를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 친구처럼 옳은 말을 하는 데 그치지 마십시오. 그것을 넘어서 더 나아가는 욥의 경험과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일하심에 대해 배워 나가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세 친구들이 욥을 붙들어 매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경지를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욥기 마지막에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판정에서 드러나는 깊은 인도하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기도
우리의 눈물, 한숨, 분노, 절망이 전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수와 실패와 무지와 게으름과 비겁함을 선으로 갚으셨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깨우쳐 주셨으니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과 사람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넉넉함을 증언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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