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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15. 욥_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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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 6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 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 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 13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 (욥 19:1-29)



설명할 수 없다는 욥의 비명

욥은 관계의 단절이 주는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더 깊은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하나님, 제가 범죄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저를 원수처럼 여기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사이의 관계가 그 정도밖에 안되는 것입니까?’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기가 이전에 알았던 종교의 체제 속에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고 친구들은 계속해서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종교 체제를 들어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욥이 옳고 친구들이 틀렸다고 합니다. 이 결론에서 되돌아보면, 이 논쟁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원칙이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분명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어떤 부분을 반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이, 나는 이 원칙 안에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나는 괜찮다 하는 자기 안심과 자기 확인의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욥이 옳다는 판정이 욥이 잘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 친구는 여전히 한계와 폐쇄 속에 갇혀 있는데 반해, 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껍질을 벗고 더 큰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친구들은 자기들이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에서 잘못되었다는 판정이 나온 것입니다.






원칙의 하나님

신명기의 약속은 쉽고 분명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으므로 복을 받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저주를 받는 것이다.’



죽음 다음을 고백하는 욥

힘없는 것을 힘 있게 만드신 그 능력이 기껏 판정이나 선택을 위해 남겨진 것에 불과한 것이냐는 질문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지금 죽음을 통과하고 있지만 다시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식의 자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어떤 이해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토해 내는 이 비명 같은 고백 속에서 창조와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인간의 완성의 과정을 섬광처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죽음 다음이 있고, 욥이 죽음 다음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신명기가 약속한 ‘순종-축복, 거역-저주’라는 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욥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설명할 길도 없고, 그 가치를 이해할 길도 없으며 욥기의 결론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원칙에 살을 붙이시는 하나님

원칙과 법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칙과 법은 전체의 질서를 위해서 필요한 뼈대일 뿐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살을 붙이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출 34:6)이십니다. 여기서 법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성실하시고 거룩하십니다. 법이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지 못하도록 막아 주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억울함을 통해 인도되는 부활 신앙

우리는 옳은 것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옳은 것을 넘어 용서하는 것입니다. 도덕이 할 수 없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살려야 합니다. 용서하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은혜 아래에서 힘을 쓰게 해 달라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참아 주어야 합니까? 원수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참아야 합니다. 너무 옳게 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욕먹지 않기 위해서, 자랑하기 위해서 옳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안다면 어떤 자리에서도 회복과 반전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갈 수 있는 최악의 자리까지 간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자리, 선과 생명이 죽는 자리까지 간 것입니다. 죽이는 자의 최악의 자리이며 망하는 자의 최악의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게 반전이 됩니다. 그게 부활의 문이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용서할 수 있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망할 것 같은 두려움, 해를 입을 것 같은 불안함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말은 영어로는 ‘Love is long suffering’이라고 합니다. ‘오랜 고통’, 멋있게 참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억울함 속에서 욥이 그 자리에 인도받고 있습니다. 그가 억울하지 않고는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억울하지 않았다면, 원래 알고 있었던 종교 체제 속에서 안심했을 것입니다. 친구들이 왜 충고를 합니까? 자기들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안심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힘들어지고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욥의 비명이 지닌 그 가치를 이해하십시오. 인생의 억울함과 큰 짐과 큰 상처와 고통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보십시오. 신앙의 발전은 각자의 고통과 상처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안식, 우리가 판단하는 보상에서 죽지 않고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보상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의 자리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를 지나갈 때 우리는 몸부림을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불평합니다. ‘하나님, 쉬운 길로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선언의 무시무시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죽음과 방불한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부디 죽음을 외면하고 얻을 수 있는 보상으로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받게 되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고통과 현실의 가치를 이해하는 믿음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기도



말씀에 비추어 보니 우리 인생에는 억울한 일도 억울한 시간도 억울한 현실도 없다고 고백해야 맞습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아직도 비명을 지르고 매달립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우쳐 주사 하나님의 평안을 주옵소서. 죽음을 통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시인하는 우리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고난, 실패, 낙심 속에서 부활을 이루시는 줄 아는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의 승리를 누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