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5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6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7 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 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 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 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1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12 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욥 18:1-21)
세 친구의 잘못
세 친구들은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자기들의 논리로 하나님의 일하심의 더 깊고 더 큰 길을 자꾸 막아서고 있다는 점이 잘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옳은 말을 했지만 하나님이 인과응보라는 우리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신다는 차원에서 틀린 것입니다.
지식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
기독교 신앙과 세상적 윤리는 옳고 그른 면에서는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차이가 나는 곳은 바로 옳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옳은 것을 알고 있지만 옳게 만드는 실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만이 이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옳은 것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권면할지라도 그것으로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옳은 것을 윤리나 도덕이나 법에 국한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지식은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능력이 되지는 않습니다. 선악을 분별할 지식과 도덕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는 것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경지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옳은 것으로 상대방을 설득해도 그 옳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옳을 뿐만 아니라 옳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이 힘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서만 허락하시는 특별한 특권입니다.
지식이나 판단을 갖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이길 힘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갈등을 이길 의지나 더 큰 지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아는 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죄악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죄책감이나 고민도 없을 텐데, 알면서도 못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답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이전까지는 알아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법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비인격적인 것이고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은 인격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규칙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 어떤 존재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람에게 충고하고 격려할 때 법칙을 동원하지 말고 그 법칙이 성령의 손에 붙잡히도록 인격성을 놓치지 마십시오.
사랑은 기다리는 것
예수 안에 있는 진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듯이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결과를 보는 법칙, 십자가 없이 결과를 만드는 기적은 기독교 안에서 허락되지 않습니다.
‘콘스탄틴주의’
'승리주의'
‘복음은 강요되는 순간 힘을 잃는다.’ 신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찾아오시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강요될 수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계몽주의
기독교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인격 안에 것입니다. 인격이란 힘이나 지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관계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가지는 힘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 모든 표현을 보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과응보는 성경의 중요한 뼈대입니다. 신명기 내내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큰 뼈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욥기가 더해지고 있습니다. 인과응보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는 사실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란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한 것을 믿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기독교 신앙의 힘입니다. 힘이 없으니 그만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결국 동일한 항복 지점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힘입니다. 성급히 정죄하거나 성급한 결론을 얻기 위하여 초조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답이 있다
흠잡히지 않고 욕먹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빌닷의 요구가 이와 같습니다. ‘악한 자들은 지구에서 떠나라. 욕먹을 짓 하지 말고 오해받을 짓 하지 말고 실패하지 말고, 늘 정당해서 누가 언제 뭐라고 하든지 떳떳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런 요구에 맞서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합니다.
‘나는 너를 믿었거늘 너는 나와의 관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 너는 나에게 욕을 안 먹으려고 내가 맡긴 것을 감춰 두었다가 꺼내 놓는 것으로 네 책임을 다했다고 한다. 나와의 관계를 그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다.’ 그가 맡은 돈보다 그것을 맡긴 주인과의 관계를 우선시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예수 안에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아는 데도 안됩니다. 오죽하면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깊은 곳으로,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까지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삶은 갈등과 실패 속에서 감사가 터지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런 흠도 없고 아무런 욕도 안 먹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존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땅에 파묻힌 한 달란트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으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욥이 끌려가는 답이 없는 자리, 모든 설명과 이해와 경험을 가져와도 답이 없는 자리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을 누가 풀겠습니까? 하나님이 푸실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 가십니까? 축복으로 끌고 가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욥기가 가진 무시무시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를 죽이십니다. 우리는 겁이 나서 그 자리에 못 가고 멀찍이 서 있습니다. 아니, 도망가는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그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 길이 고통스럽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험을 받기 전의 욥과 시험을 통과한 욥은 그 경지가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경지입니다. 그러니 순종하고 각오하고 기도하십시오. 인생을 대강대강 살 생각은 빨리 걷어치우고, 사랑이 갖는 무시무시한 과정을 통과하여 기쁨과 충만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는 사랑을 원하기보다 안전을 원하고 명예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과 오해와 모욕과 실패로 인도하시는 듯 보입니다. 우리를 부활로 인도하시는 길은 그뿐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으나 겁낼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다른 것으로 때우려고 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선행과 윤리와 책임으로 짐짓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을 곤고하게 하시는 이유를 말씀으로 깊이 해석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 인생을 주의 이름으로 지킬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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