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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13 욥_하나님 왜 나를 대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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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6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고 잠잠하여도 내 아픔이 줄어들지 않으리라 7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8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습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내 앞에서 증언하리이다 9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적대시 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원수가 되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보시고 10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11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 12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서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 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14 그가 나를 치고 다시 치며 용사 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15 내가 굵은 베를 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16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17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 17: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 16:1-17:16)

외면하고 싶은 자리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있으며 해답이 없는 자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답을 찾을 수가 없고 가장 가까운 사람도 편을 안 들어주기 때문에 변명마저 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고 합니다.
어째서 인간에게 이런 고통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쉽고 가볍게 목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요구되는 십자가

예수께서 사탄을 물리쳐 무엇을 하십니까?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일이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하여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지신 것이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모범으로도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 그 길을 욥이 걸어갑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는 말이 지닌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욥입니다. 이 길을 통과해야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의 영광을 가지게 됩니다. 이 영광은 하늘로부터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난을 통과해야만 얻어지는 영광입니다. 왕관이거나 선물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완성에 고난이 필수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 마옵소서’(마 16:22)라는 항변에 대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마 16:23)라고 명하는 이 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 길을 통과하기 전에 타협책이나 가벼운 대책으로 그 길을 중단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선언이 욥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신


욥 자신이 답을 못 찾는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필사적인 불평이 경건을 표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들은 모릅니다. 욥 자신도 자기가 그러는 중에 있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 외에는 다른 답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로 내몰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이 답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난은 당연한 것이랍니다. 현재의 고난을 통과해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의 자리에 갈 것입니다. 로마서8장 23절에 있듯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답이 없는 이 길을 갑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그 증거는 예수다. 우리로 시원한 인생을 살게 놔두시지 않는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가 비교할 수 없이 커서 우리는 하나님을 괜히 믿었다는 생각이 드는 현실을 살게 된다. 하나님을 안 믿었더라면 다른 것으로 때우든지, 타협해서 어떻게든 살았을 텐데, 하나님이 놔두지 않으셔서 무엇을 해도 안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여 활을 쏴서 내 콩팥과 간이 녹아난다.’ 어디에서도 쉬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른 것으로 답을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목적하신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간단한 것으로, 대체물로 만족하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욥이 친구들과 계속 이 문제로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는 길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과 죽어 본 적이 없는 아들과의 대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 더 잘났느냐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죽어 줄 만큼 그 아들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에게 고난을 피하시라는 베드로의 발언에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길은 꼭 필요한 길이라고 선언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하다는 말을 할 때는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놓치면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기 위하여 이 길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억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고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과 영생을 위한 유일한 조건인 것과 동일하게,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입니다. 그러니 엄살떨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속이지도 마십시오. 예수를 믿고 사는데도 이상하게 힘이 듭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마취하거나 잠재우지 않으십니다. 쓱 업어서 날라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모든 억울함과 비명과 불평을 넘어 하나님 앞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이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히 5:8-9)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와 자랑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비명은 사실 영광의 길로 붙잡혔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만은 우리가 하나님의 높이와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놓아두지 마옵소서. 붙들어 이 길을 건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부활의 승리, 부활의 영광을 얻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