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1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13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4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 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욥 22:1-30)
엘리바스의 억지 주장
엘리바스가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려다 보니, 욥이 불의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틀렸을 리는 없으니 욥에게 분명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식의 싸움입니다.
자기 말을 증명하려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욥기의 내용들은 어느 단어 하나 버릴 수 없습니다. 옳은 말이 올무가 되고 고소가 되고 가시가 되어 우리를 찢고 우리를 넘어뜨리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이 욥기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죄란 어디에나 따라오는 경향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죄는 하나님을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고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란 어떤 형태나 규칙을 가진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향입니다.
죄는 명분도 아니고 규칙도 아니고 경향입니다. 죄는 병균같이 어디에나 따라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고의 명분, 최고의 실천에도 죄가 따라 들어와 그것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
죄는 진심에도 따라 들어옵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주장을 하든지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더 가깝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가를 보십시오. 그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풍성하고 깊게 만드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필요 없게 만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다 옳은 말이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는 주장입니다.
욥기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슬쩍 드러나는 셈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해야 한다는 정답에 이르게 됩니다.
비명과 절망과 고난과 억울함이 욥을 하나님의 면전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세 친구는 끊임없이 충고함으로써 욥이 하나님을 대면할 기회와 하나님과 더 깊어질 기회를 막고 있는 꼴이 되었습니다.
책임이란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인데, 그것을 자책함으로써 면합니다.
자신을 흠잡힐 것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려고 하는 것도 죄에 걸립니다. 옳은 회개를 하는데도 죄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또 우리에게 독립을 허락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살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도망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자기 치장에 불과해집니다.
우리 일생에 일어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사실과 우리가 겪는 모든 경우와 모든 정황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 탕자가 집을 나가는 것 같은 행위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자신의 보호와 능력 안에 끌어안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면, 자책과 불평으로 그 일이 만들어 내는 진정한 결과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더
살면서 확인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실패와 실수와 엎어짐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묶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혼자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에게서 분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욥의 울부짖음은, 자신이 비록 고난받고 있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니 그가 만든 창조물에 대하여 아무 대책이 없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다. 너희가 나에게 권면하는 내용을 나도 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니 창조를 해 놓고 실패하실 리가 없다. 죽어 없어지는 것이 끝이라면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냐? 만일 하나님이 내가 당하는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현실까지도 싸안고 있다면, 여전히 나를 놓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어두움과 고난과 절망에서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신비를 알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으로 영광의 중한 것을 만드십니다. 우리는 잘했을 때보다 못했을 때 더 많이 깨닫습니다.
죄란 하나님과 분리된 것입니다. ‘네가 잘못할 때도 하나님이 너를 놓지 않는다. 너는 포기되지 않는 존재다. 너는 그리스도와 묶여 있고 죽음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네 인생과 네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든든히 믿고 이겨라’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겨라’는 기준을 만족시켜라, 진실되어라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신비함이 승리로 종합되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 신실함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지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더’라는 성경적인 권면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승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우리를 손해 보게 하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도망가지 말고 덤비십시오. 이겨 내야 하는 것도 있고 감당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고, 더 가까이 잡아끄신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각자의 실존, 인생,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감당하게 하옵소서. 자신을 용서하고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짊어지고 하나님이 그 속에서 함께 살라고 하신 우리의 이웃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깊어지게 하시고 높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누리게 하시고 나누는 지경에 이르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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