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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18.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_율법, 인격이신 하나님이 주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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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롬 7:7-13)





경기를 위해 존재하는 규칙

 법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게 해 주는 어떤 눈금이자 경계입니다.

법칙보다 크신 하나님의 일하심

인격은 법과 다른 존재입니다. 법은 중립이라서 정이 없습니다. 그저 무정한 규칙일 뿐입니다. 이 법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법 자체에서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법 자체는 의도도 감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시고 우주와 역사에 목적을 가지신 이가 인격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격의 가장 대표적인 성정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점을 놓치면,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인격과 성품에서 벗어나 언제나 사람을 잡는 무기가 될 뿐입니다. 생명을 다루지 못하고 생명에 늘 장애가 되며 생명을 해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찾아오시고 구원하시며 우리의 운명을 선언하시는 이가 인격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만드신 분이 도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율법이 드러내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은 다만 도덕이나 법칙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이는 바로 이런 하나님, 이런 인격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망은 무엇 때문에 온다고 합니까? 사망은 죄 때문에 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무엇으로 그 성립 근거를 가집니까?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 패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승리하면 살아남고 패배한다고 해서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모가 와서 등을 두드려주며 “잘 싸웠어. 다음번에 이기면 돼”라고 위로하며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과 영광을 잘잘못의 법칙으로 가두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큽니다.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진 것은 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편을 들어주듯이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너 다시는 그러지 마라, 그렇게 하면 결국 너한테 손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아직도 모르겠다고? 밥 먹고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모르겠다고? 너 진짜 죽을래? 라고 하십니다. 정말 죽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넉넉함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스스로 채우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 대강 살아도 되겠다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원칙을 넘어 위대함의 자리로

한 개인 영혼에게 필요한 유익은 외형적 조건에 결단코 붙잡혀 있지 않더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어느 경우에도 유익을 보더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만 법대로만 집행하는 심판자에 불과하다면 은혜를 베푸는 일이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분이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인격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원칙을 지키면 그만이다, 원칙이란 아무래도 좋아, 라는 식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복과 명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의지를 동원하여 성실하심과 긍휼하심과 기다리심과 용서와 이해로 우리 안에 이 일을 만들고야 마십니다. 이것이 인생이요, 역사입니다.

각자가 훈련을 받아 이 위대한 자리,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인생 속에서 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 되물을 때마다 그 법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가로 우리의 생각을 돌려 자비롭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넉넉함으로 베풀게 되는 삶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이해하고 기다려주며 될 때까지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라고 하는 걸까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 겁먹지 마라, 너 정죄하고 다니지 마라, 너 인상 쓰고 다니지 마라, 네가 가진 자인 줄 알아라, 넉넉해라, 이것이 바로 ‘사랑하라’는 말에 담긴 뜻입니다. 사랑은 불타는 것이 아니라 넉넉해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 패배 속에서도 명예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 여러분이 직면하는 조건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누리는 넉넉한 성숙과 영광과 명예가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인생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한순간도 필요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서 모든 시간과 모든 경우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의 삶이요,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눈빛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고 우리의 인생을 걸어가 하나님의 사람이 모든 경우를 어떻게 넉넉히 받아내는가를 보이는 위대한 길을 걷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