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롬 6:1-14)
그럴 수 없느니라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신 구원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뒤엎어 회복하고 만회할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 나온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말씀은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조건을 내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키는 일이 가능하게 된 현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는 자리에 왔다는 선언이며, 종 되었던 곳에서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벗어났다는 선언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은혜란 지리적으로 볼 때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옮겨진 것을 말하며, 시간적으로 볼 때는 종 되었던 과거에서 해방된 현재로 온 것을 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있던 삶을 정리하고 끝장을 내어 새롭게 열린 현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진 방식을 은혜라고 합니다.
잘못한 자리에서 잘한 자리로 나온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잘못한 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을 말하고, 잘한 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누가 하신 일입니까? 집 나간 자식을 쫓아가 붙들어서 데리고 돌아온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일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의 성실과 사랑과 능력으로 그리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를 붙들어 오신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실수했으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고, 그가 잘못했으면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때로는 “너, 거기 가면 안 돼”라고 붙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적 관계에서 나오는 고급한 책임이요 영광입니다. 은혜는 이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돌아갈 수 없어서 복된 자리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과거가 해결되어 지금은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에 있습니다. 이미 얻었으니 이제는 누리자고 합니다. 이것이 현재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하여, 이미 은혜 속에 들어간 현실을 완료형으로 표현했습니다. 지금 이 은혜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현재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바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미래에 속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의 완성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현재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 시작된 복된 백성의 자리를 누리는 때입니다.
절망과 무지와 비참에서 벗어낫다는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새 생명의 현재를 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우리에게 이루시기 위해 펼치시는 그분의 의지와 능력과 약속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던 필멸의 자리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으로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자고 합니다.
죽음이 끝이고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자리에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를 당신과 묶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일으키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었기 때문에 죄와의 관계는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죄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내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로 말미암은 새 종족이 되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간이 그렇게 흘러온 것처럼 은혜가 우리를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 왔고, 현재에서 저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또한 옮길 것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같이 은혜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머무는 현재란 미래를 향해 있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에 있는 현재이기 때문에 방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와 죄의 관계는 없어졌는데 이는 내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죄의 관계는 없어지고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생겼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된 것을 명예로 알아야 합니다.
누적되고 채워지는 현재
“좋다. 네가 그렇게 어리석게 말해도 좋다. 그러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입니다. 네 맘껏 옛날을 추억해 보아라, 회고해 보아라, 후회해 보아라, 원망해 보아라, 너희가 아무리 그래 봤자 돌아가지 못한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못난 것 때문에 시간이 역행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알라, 네가 과거를 돌아보고 울고 버틸 때에도 하나님은 너를 끌고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해마다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세어 보아 육십 세가 넘거든 이제는 그만 칭얼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두서너 개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나지도 않는 나날인데, 이 평생을 하나님이 하루도 대강 넘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비가 내려 헛되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같이 내 말과 내 일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 내가 쉬는 날은 없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 아니냐, 그러나 그중 하나도 내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너희는 머리칼까지 다 센 바 된 나의 자녀이니라, 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엄정함과 신실함을 인생에서 확인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정말 헛된 것입니다. 이런 확인은 특별한 경험이나 기적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면서 누적되는 인생의 무게와 영혼의 깊은 갈증에 대해 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면, 인생은 정말 허무합니다.
창조에서 심판까지 하나님이 지으시고 목적하시고 채우시는 현재가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우연이나 체념에 모든 것을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감싸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눈물과 실패를 가지고도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적이 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라는 방점이 찍힐 때까지 놓아두시지 않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시간과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각각의 인생 속에 적용되는 성육신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정죄는 금물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당신께서 목적하신 구원을 그들에게 적용하실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만큼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가장 반대했던 자가 돌아선 극적인 예가 바울이므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연장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간적으로는 이미 끝났으면서도 개인의 현실과 실존 속에서는 지금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우리 이웃들에게로 가 그들에게도 이 구원이 적용됩니다. 어떤 이웃에게로 갑니까? 나와 같은 그 이웃입니다.
성공했으면 성공한 자 옆에, 실패했으면 실패한 자 옆에, 잘난 척한 사람은 잘난 척하는 자 옆에, 억울하면 억울한 자 옆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것 없이는 이웃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처지를 겪어 보지 않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동정이거나 원망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게 뭔가, 하고 한숨짓는 자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오해와 수난 속에 살고 있듯이 꼭 그렇게 예수님이 사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환난이라는 현실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환난 속에 있습니다. 새 나라에 속했으나 환난 속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적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억울하십니까? 억울한 자 옆에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억울해 보지 않고는 억울한 자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싫어하고 가치를 두지 않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영혼의 소중함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구체적 손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수용하기 바랍니다. 거기서 현재를 살아가십시오.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아는 자의 늠름함과 넉넉함을 가지십시오. 그때 이런 것을 갖고 있었더라면, 그때 이걸 했더라면, 이런 후회와 가정은 모두 버리고 여러분의 구체적인 인격과 생애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적을 보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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