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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15. 권세들과 사랑의 힘 / III. 혁명적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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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의 영으로 능력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새로운 실재가 탄생했다고, 그 이름은 ‘죄 사함’이라고, 우상숭배에서 돌이켜야 한다고(‘회개’) 선언해야 한다.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이 새로운 종류의 힘을 세상에 불러왔다. 그 무슨 일이 바로 족쇄를 풀고, 우상을 깨뜨리며, 죄를 떠나게 하는 능력으로, 곧 ‘죄 사함’이며 ‘순전한 은혜의 사랑’이며 예수님이다.
죄 사함은 새로운 실재이며 새로운 창조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출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는 이 새로운 창조세계에 속하려면, 우상들—그들의 권세는 이미 깨어졌다—에게서 돌이켜 예수님의 승리의 축하 행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 생각과 행위 자체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죄 사함의 새로운 세계, 부활절 아침에 하늘과 땅의 실재로 시작된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부활과 죄 사함은 옛 창조세계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세계의 확실한 표지이며 특징적 표지다. 부활과 죄 사함을 믿는 것은 새로운 창조세계라는 실재를 엿보고 그것을 붙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새로운 실재이자 새로운 존재 방식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속되는 혁명의 핵심이다. 즉 인간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죄 사함(이제는 패배한 우상들에게서 돌이킨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용서)으로 시작해서 죄 사함(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에게 잘못한 모든 이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성령을 힘입어 베푸는 용서)으로 지속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죄 사함이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커 보이는 이유다. 하늘이 땅에 임할 때,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그분의 뜻이 천사들의 세상에서처럼 인간 세상에서도 이루어질 때 이 용서는 이렇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죄 사함은 새로운 실재다. 혁명의 능력이다. 주의 기도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같은 일인 셈이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고, 실제로 용서한다. 이것은 우리를 늘 놀라게 하는데, 아마도 용서야말로 온전히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세상의 확실한 진짜 표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활과 죄 사함은 한 가지나 마찬가지다. 둘 다 십자가에서 거둔 승리의 직접적 결과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십자가에서 이 승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부활은 죽음이 패한 결과요, 죄 사함은 죄가 패한 결과다. 용서를 배운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에게만 치유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한다. 그들 자신도 치유를 받고 있다. 부활은 그들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몹쓸 짓을 당했지만, 자신의 삶이 뒤틀리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약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과거에도 지금도 위대한 힘이다.
부활과 죄 사함은 십자가에서 거둔 승리의 특별하면서도 광범위한 결과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세상 나라들은 이제 해방되어 한 분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자유

십자가 때문에,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께 마음껏 충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용서하지 않는 어둠의 사고와 실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거둔 예수님의 승리는 이제 드디어 그 권세가 깨졌음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텐데, 십자가가 그분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통로가 될 것이다(복음서의 주요 주제). 또한 십자가는 “이 세상의 통치자”, 곧 열방을 사로잡고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찾아온 그리스인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모든 백성”이 자유로이 그분께 나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이방인 선교는, 창조주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열방을 사로잡고 있던 권세들을 무너뜨리신 사건의 직접적이고 필수적인 결과로 여겨졌다. 이때까지도 열방은 종살이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자유로 가는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이제 드디어 사탄의 권세가 깨졌고, 죄 사함과 새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이 모두에게 열린다!
창조주는 이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계셨다. 그분은 과거에 베일을 드리우신 다음,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에게 이 어리석은 행동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고 계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 만사를 심판하실 그 날을 경고하셨다.
그 메시지에는 능력, 죄 사함의 능력, 새 세상의 능력, 새 창조의 능력, 새 출발의 능력이 있었다.
이교도 관습에서 활동하던 어둠의 세력들은 “현재의 악한 세대”에 세상을 볼모로 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권세들’은 그 힘을 잃었다. 그래도 여전히 분노하고 소리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더 강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죄 사함의 능력이다. 과거는 완전히 덮어졌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혁명에서 힘(권세)은 곧 사랑의 힘으로 재정의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통치는 선포되어야 비로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권세들은 힘을 잃어서,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수 없다. 과거나 지금이나 복음은 세상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는 강력한 선언이요, 그분께 믿음의 충성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복음에 이런 능력이 있는 까닭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정말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권세들을 물리치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혁명은 첫 번째 성금요일에 이미 일어났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치명타를 입었다.
“이제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주되심 아래 살면서 그분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는 뜻이다.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고,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단순히 그 혁명의 수혜자가 아니라 실행자가 되어야 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믿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는가? 우선, ‘권세들’이 십자가에서 패했지만 아직 수많은 사람들을 종으로 삼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 있는 모든 교회는 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우상숭배가 종살이라는 결과를 낳는 것을 볼 줄 알뿐더러 그런 곳에 죄 사함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종으로 삼는 권세들을 깨뜨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은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늘 그렇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도는 꼭 해 봐야 하다. 확실히 돈이 주요 요인이고, 자신들의 ‘계몽된’ 문화적·기술적·경제적 지위로 인해 오랫동안 이익을 본 나라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들이 1980년대에 직면했던 종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종교’를 정의함으로써 나머지 현실과 구분하려 했던 계몽주의의 방식은 누가 봐도 확실한 허세였고 이제 그 가치가 드러나고 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꾸준한 발전에 드리운 그런 신중한 외양에 만족했다면, 이제 그 정체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
그들이 앗아간 힘에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그래야 형편없이 망가진 이들이 다시 한 번 희망을—점점 더 외지인을 환영하지 않는 북유럽에 도착하고 싶다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가질 수 있다. 너무 많은 교회가 내가 앞서 설명한 모델에 근거한 ‘구원’의 사유화와 영성화에 공모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승리를 알리기가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 그저, 앞서 보았듯이 일종의 승리주의로 귀결되는 17세기 낙관주의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온전한 진리, 곧 어둠의 세력을 깨뜨리는 죄 사함을 붙잡고, 말과 이성뿐 아니라 상징과 행동으로 그 진리를 선언하고 적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서다. 이 과제가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부활의 내용이다.
복음이 우리 시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힘에 맞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선은, 다양한 집단에서 서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고 비난하는 저급한 프로이트주의를 넘어선다는 뜻일 것이다.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을 향한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재확인해 준다는 뜻일 것이다. 오해가 너무 널리 퍼져 있고 생각들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서 전진해야 한다. 특히, 죄 사함이 그 승리의 핵심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이 말도 오해하기 쉽다. 사람들은 나쁜 행동에 빠진 사람을 보고 “당신은 죄 사함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마치 ‘용서’가 ‘관용’인 양 또는 무슨 일이든 상관없다는 사면 선언을 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죄 사함’은 ‘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회개’란 (그런 일이 들통났으니!) 단순히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이 섬기던 우상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사업이나 금융의 세계처럼, 복권이나 도박의 세계처럼, 맘몬은 모든 거리와 컴퓨터 화면에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세계에서는 아이패드나 아이폰을 비롯한 여러 스마트 장치에서 아프로디테를 불러올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 우상들을 극복하셔서 이제—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대부분이 믿는 것과 상관없이—우상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화평하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덕적 노력만으로는 이 우상숭배를 피할 수도 없고, 그 세력을 깨뜨릴 수도 없다. 신약성경에서—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명령한—도덕적 노력은 십자가에서 거두신 최초의 승리라는 맥락에서 가능하다. 도덕적 노력에는 정신적 노력이 필요하고, 정신적 노력은 그 승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그 승리가 오늘과 내일에 적용되려면 기도로 바뀌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성례전이 도움이 되겠지만, 영적 지도와 상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실패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아무도 그리스도인들이 갑자기 완벽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이런저런 삶의 영역에서 죄를 지을 때는 근본적인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연주자가 전혀 엉뚱한 교향곡을 연주한다든가, 손님을 초대한 집주인이 포도주 대신 식초를 붓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내가 앞서 강조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인간의 소명을 ‘행위 계약’으로 본다면, 도덕적 실패를 단순히 특정 규정의 위반으로만 보기 쉽다. 하지만 거기에는 더 큰 의미가 있으니, 우리가 배역을 맡은 새로운 드라마의 대본을 거부한 것이다.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은 무대에 올라 어제 올린 연극의 대사를 읊는 배우와 같다. 우리는 새로운 연극의 새로운 대사를 받았다. 그 드라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은 거룩함에 대한 새로워진 관점을 포함한 새로운 의무를 맡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규칙’이 여전히 중요하기는 해도 더 큰 소명 아래서는 작은 요소가 되는 예배와 증거의 삶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소명의 일부는 다른 신을 숭배했던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기념하는 것이다.
맘몬과 관련해서, 우리는 어떻게 돈을 사용해야 하는지, 특히 어떻게 기부해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아프로디테와 관련해서는, 결혼생활을 경축하고 유지하는 법과 독신생활을 경축하고 유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둘 중 어느 상태든 충돌하고 반대되는 욕구로 힘들어 하는 이들을 어떻게 상담하고 위로할지도 알아야 한다. 이 시대의 화려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욕구와 열망이 절대 우리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행복 영역에서 근본적 불안정으로 가는 길이고, 신학적 신념 영역에서 영지주의를 낳는다(자기 안에서 숨겨진 신성을 발견하려 애쓰고, 거기에 충실한다). 예수님도 예언자의 전통을 따라 분명히 하셨다. 인간의 마음이 거짓되고, 거기에서 나온 온갖 종류의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래서 인간은 진정한 인간 존재 곧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복음은 당신의 깊은 감정과 맞닿는다거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복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든 일이고, 한 달이나 10년, 평생 해도 쉬워지지 않는다. 여기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통해 얻은 승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고난을 통해 시행된다. 그들 대부분은 돈과 섹스를 비롯한 많은 것과 관련해서 유혹을 받으면서 때때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권력도 있다. 복음의 핵심은 권력을 재정의한다. 그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한 핵심 방식 중 하나였다. 십자가에 삶을 뒤바꾸는 능력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세속 권력이 흉내 내거나 왜곡해서 패러디한 참 권력을 구현하고 표현하며 상징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자신을 주는 사랑의 힘, 곧 맨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고 지금 세상을 다시 만들고 있는 힘이 진짜임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또한 다른 형태의 ‘권력’, 곧 세계 제국과 재벌에서부터 학교, 가정, 범죄 조직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운영하는, 부패하고 자기를 섬기는 방식은 왜곡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제도가 자동적으로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고 전제해서는 안 된다. 이 대목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믿는 이들은 할 말이 있다.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역할은 권력의 부패를 개탄하거나 소위 기독교 정책을 옹호하는 후보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 우상이 점령한 영역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지칭하는 행동의 일부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역할은 권력에 진실을 말하되, 특히 힘없는 자들을 대신해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 소명의 핵심은 공식(정부 관료), 비공식(뒷골목 깡패) 권력자들에게 인간으로 존재하는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기도하면서 사려 깊게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길이 진정한 길이요, 예수님의 길이다. 이것은 “우리의 구체적 의제를 공유하는 사람을 공직에 선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적절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현재 누가 집권하고 있든,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즉 나라와 진리, 권력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
공생애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길, 곧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취되고 부활을 통해 더 큰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길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아름다운 관점을 포함하여 성경의 옛 예언들과 공명한다.
초기의 많은 기독교 사회 개혁가들처럼,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담대하게 외쳐야 한다. (모두가 동정심과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유명한 패러디가 있다. 적어도 많은 진짜 피해자들에게는 이 일로 유익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로 천국 가게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효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상상한 ‘기독교적’ 사적 공간으로 숨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죄 사함은 ‘권세’의 장악력을 깨뜨리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를 날마다 주장하고 현실화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런 일은—문자 그대로, 노예 거래를 종결하고 노예를 해방함으로써—전에 일어났고, 또다시 일어나야 하며, 십자가의 승리가 실재이고 그 승리를 실행하는 성령의 능력도 실재이기에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 특별한 왕 같은 제사장 사역으로 부름받은 이들, 사랑의 능력을 재주장하고 그 강력한 사랑을 노예 된 세상과 연결하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일로 부름받은 이들은 그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로마서 8장 26-27절의 정신으로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이들은 대처하기 힘든 도전에 직면하여 성령 안에서 탄식할 것이다. 하지만 승리는 이미 그들의 것이다. 창조세계의 그 어떤 세력도 이 전능한 사랑을 막을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의 소명이 새로워진 인류 곧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에서 그 나라를 위해 일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기에, 우리 개인의 삶도 동일한 비판과 동일한 소명에 예속되어야 한다.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의제를 실행하려고 남 탓을 하면서도, 개인의 거룩함에 대한 도전에서는 자신을 면제하는 사람이 설 자리는 없다. 자기 문제에 너무 경도된 나머지 가난한 사람들의 곤란을 보지 못하는 반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대 담론을 핑계로 귀찮게 하는 문제들에 우리 귀를 막아 버릴 위험은 늘 있다. 거룩함은 다차원적이다.
그런데 십자가가 항상 그 거룩함을 형성한다. 바울은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서 진정한 인간의 소명을 왜곡하는 충동과 행동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재정 부패, 성적 부도덕, 악, 악의적인 말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예를 들어, 골 3:1-11을 보라). 물론 행동보다는 말이 쉽지만, 여기서도 십자가의 승리가 핵심이다.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니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규칙은 중요하지만, 그 규칙이 중요한 이유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더 큰 소명 안에 있는 보호 난간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려는 유혹이 들 때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당신의 능력, 곧 당신과 당신 인생, 당신과 접촉하는 세상에 행사해야 할 힘을 외부 세력에 조금씩 넘기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셈이다. 사탄의 통제하에 일부 ‘권세’가 활동하고 있는 영역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동시에 당신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던) 진정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능력을 행사하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소명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죄는 우리를 우리의 진정한 임무에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진정한 소명을 (기껏해야) 왜곡할 뿐이다. 죄는 권세들의 힘을 유지해 준다. 죄에 저항하기란—특히 우리가 그 방향으로 손쉽게 우리를 끌고 가려는 습관을 허용했을 때—쉽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좌절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세상에서 정의나 자비가 실행되지 못한 상황이나 세계 정치나 우리 공동체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당신이나 내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아는 하나님을 모든 악한 권세를 이기고 이미 승리하신 분으로 찬양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직장이 어떤 영역에 있든 두려움과 좌절로 가득 찬 사람과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성령이 선물로 주신 중보와 ‘영광’의 결합 사역은, 원한다면 우리 것이다. 물론 바울이 분명히 경고하듯이, 고난이라는 배경이 늘 따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고난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행동한다면, 우리가 이 사역을 감당할 때 눈물과 피로, 성령님의 슬픔과 탄식을 통해 예수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 중보와 청지기 사역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를 위해 어떤 사람들은 묵상과 조용한 중보의 삶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은 집 없는 아동과 약물중독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 허름한 주택 단지로 이사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공부(성경 연구나 근대 경제학, 토지 관리 등)로 부름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세상에 신선한 지혜를 가져오기 위해 최고 수준에서 하는 일로 부름받는 사람도 있다. 십자가 혁명은 우리를 해방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한다. 우리를 막는 유일한 방해거리는 우리의 관점이 부족하거나 메시아가 죽으신 진정한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을 재확인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부족한 전달 방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늘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원래 의도대로 전해지려면 교회의 왕 같은 제사장 소명이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창조세계의 표지, 십자가 승리와 죄 사함이 실재라는 표지로 작용하는 배경에서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정의와 아름다움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신선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전해서 믿게 하려는 사람들처럼 똑같은 것을 자신의 삶에 새겨 넣고 고정해야 한다. 그것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려 한다는 것, 그것이 요점이다. 거룩함과 사명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 다 지금까지 권세들이 지배했던 곳에 예수님의 다스림을 가져온다. 권세들은 싸우지 않고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예수님처럼, 정확히 그분이 첫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싸움과 그에 따른 고난(무슨 종류든)은 부수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소명의 핵심에 있는 통찰은, 고난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어두운 터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난은 그 미래를 성취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 십자가 형상을 띤 사명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본 사명은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요,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님의 승리의 소식으로 우상에 맞서서 인간의 삶과 제도 속에 하나님나라의 표지를 세우기 위해 일하는, 성령이 이끄시고 십자가가 빚어내는 사역이다.
궁극적 미래는 ‘사후 세계’ 이후의 삶, 다시 말해 부활의 삶과 궁극적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권세들’에 대해 유월절 승리를 얻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죽으셔서 이 승리를 얻으셨고, 기독교의 사명은 똑같은 수단으로 이 승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월절은 거대하고 매우 중요한 실재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창조에 반대하는 모든 권세를 물리치셨다. 그분은 그들이 빌려 입은 예복과 무의미한 왕관을 박탈하셨다. 또한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권위와 책임을 ‘권세들’에게 넘겨준, 죄와 인간의 우상숭배와 불의를 해결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로 딱 들어맞는 이 둘을 행하신 방식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자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그분은 다윗의 정당한 계승자요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이중의 이유로 이 지위를 얻으신다)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이제 끝까지 사랑하셨”고,요 13:1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려놓는 ‘더 큰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복음서에 나오는 계속되는 잔치와, 강도와 함께 골고다에서 달리신 데서 볼 수 있듯 우상숭배자, 정의롭지 못한 자, 죄인, 약한 자, 미련한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들을 대신하실 수 있는 배경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죄를 예수님께 전달하여 그분이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는 모면할 수 있는 천상의 장치인 ‘행위 계약’ 때문이 아니라, ‘소명 언약’—이스라엘의 소명, 인간의 소명, 예수님의 소명—때문이다. 그 언약 안에서, 해와 별을 만드신 흘러넘치는 사랑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오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에게서 더 흘러넘쳤고, 모든 사람을 그분께 인도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지막으로 ‘최대한도로’ 흘러넘쳤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실망과 실패, 좌절, 혼란, 오해, 고통, 슬픔을 뜻한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혁명의 승리는 지역 사회는 물론, 온 나라와 특히 개인의 삶에서 혁명의 길을 만들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혁명이 일어났고, 이것은 이제 세상에 대한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통해 실행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그들 안에서 일어난 진리가 되어야 한다. 혁명은 매순간 십자가 형상을 띤다. 세례가 그렇다. 세례는 늘 죽는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맨 처음 혁명을 촉발시켰던 십자가가 늘 혁명을 형성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늘과 땅의 위험한 교차로에 잠시 서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앞으로 올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요한은 사랑, 언약적 사랑, 끝까지 이어질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13:1 사랑은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낌없이 다 해 주었다. 사랑의 원리가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에 적합하게 이들을 정결하게 하셔서, 이 새로운 성스러운 공간에 있게 하셨다. 이들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려면 깨끗해져야 했다. 발을 씻어 주신 이야기는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유명한 시의 양식을 따른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서 종의 죽음을 죽으시고 나중에 높임을 받으신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겉옷을 벗으시고 제자들을 발을 씻는 종의 일을 하신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옷을 입으신 후에,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였다고 말씀하신다. 발을 씻기신 행동은 예수님이 자신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 성취하시려는 바를 비유하신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천국의 겉옷을 포기하셨다. 제자들을 깨끗하게 씻기셔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축소판인 하나님의 새 성전의 일부가 되게 하셨다.
어떻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 참 하나님의 형상이요 참 인간인 그 아들의 사역을 통해서다.
사탄과 바벨론, 바로의 권세가 깨졌기 때문에 새 창조가 가능하다.
십자가와 그 십자가가 드러내는 사랑으로 구출된 사람들은 십자가와 그들을 통해 그 십자가가 세상에 드러내는 사랑으로 형성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는 방법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아 내는 방법을 배운다.
우리는 죄에서 깨끗해져서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악을 이겼다. 사탄이 최악의 발악을 하고 무너졌으니 말이다. 자기를 주는 사랑의 본보기가 있다. 우리가 그 본보기를 따를 때 세상이 믿게 된다. 그리고 매우 개인적인 도전이 있다. ‘너는 나를 위해 이 일을 하겠느냐? 네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너를 위해 이 일을 할 테니 감사 하라.'
십자가는 기독교의 메시지, 기독교의 이야기, 기독교의 삶과 사명의 핵심이다. 세월이 흘러도 십자가의 혁명적이고 변혁적인 능력은 그대로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상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그다음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개인적 이야기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큰 이야기가 끔찍하면서도 생명을 주는 명료성을 얻는 곳이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형은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한 사람이, 역사의 모든 순간을 대신하여 한 순간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권세들이 힘을 잃었고, 인류는 구속되어 예배자와 청지기의 자리를 회복하고 메시아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승리를 찬양하고 성령의 능력을 얻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드러냈다.
창조주가 당신을 진정한 인간성으로 부르실 때, 당신을 불러 그분의 형상을 닮게 하실 때 그 언약의 품에 안겨라. 사랑의 힘이 권력에 대한 사랑을 이겼을 때 영단번에 일어난 혁명을 기념하라. 그리고 그 동일한 사랑의 능력 가운데, 지금 여기서 그 혁명에 가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