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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하나님 나라의 비밀-스캇 맥나이트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논지들 - 스캇 맥나이트 / 하나님 나라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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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논지들 

- 스캇 맥나이트 / 하나님 나라의 비밀

1. 유대교 (구약성서, 요세푸스 등)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는 본래 "구속"이나 "구원"이 아니라 "국가"와 "이스라엘" 같은 단어들과 동의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백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회윤리나 수곳의 순간 같은 것에 제한될 수 없다.

2. 하나님 나라는, 비록 강조의 정도는 다양하지만, 거의 언제나 왕, 통치, 백성, 땅, 율법의 복합체다. 교회 역시 복합체다. 즉 그것은 왕(그리스도), 통치(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다스린다), 백성(교회), 땅(이스라엘이 디아스포라까지 확대됨), 율법(그리스도의 율법, 즉 성령 안에서의 삶)의 복합체다.

3.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다." 즉 그것은 현재이자 미래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최후의 심판과 의의 수립을 뒤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성대한 교제를 수반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는 지금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한 기조를 설정한다. 교회 역시 종말론적이다. 즉 그것도 현재이자 미래다. 교회의 미래 역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대한 교제다.

4.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비교할 때 아주 심각한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현재의 교회를 비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둘 다, 즉 "지금"과 "아직" 모두다. 교회 역시 둘 다, 즉 지금과 아직 모두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의 종말론적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비교하려면, 우리는 지금의 하나님 나라와 지금의 교회를, 그리고 아직의 하나님 나라와 아직의 교회를 비교해야 한다. 우리가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현재의 교회를, 혹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미래의 교회를 비교할 때, 우리는 거의 동일한 정체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곧 교회이고,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다시 말해 그 둘이 동일하지는 않으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둘은, 비록 각각의 용어가 약간 다른 현상을 제공하지만(특히 "하나님 나라"는 충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교회"는 교제를 강조한다), 동일한 왕이신 예수 아래에 있는 같은 백성이라는 점에서 같다. 사소한 차이들을 젖혀둔다면, 우리가 그 두 용어를 동의어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 교회가 역사를 통해 받아온 유혹은 "하나님 나라"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자신을 국가 혹은 문화의 세력들과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종종 콘스탄티누스의 유혹이라고 불린다. 미국에서는 도덕적 다수 혹은 기독인 연합(보수적 성향의 기독교 단체들)과 기독교적 진보주의자들 모두가 콘스탄티누스에게 굴복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의 힘을 사용해, 비록 그것이 다수의 힘이라고 할지라도, 성서의 가르침을 합법화하고 그 가르침의 적용 범위를 넓히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 윤리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정의로 윤리화하고, 다음에는 정의를 "사회적" 정의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일을한다.

  • 세속화: 우리는 깊은 뿌리를 지닌 사랑의 윤리를 세속화하여 그것을 "관용"으로 만든다. 우리는 십자가를 세속화하여 그것을 "봉사"로 만든다. 우리는 부활 역시 동일하게 세속화하여 그것을 "일반된 희망"으로 변질시킨다.

  • 정치화: 우리는 예수와 성서가 전하는 바람직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초래하기 위해 스스로 정치 과정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정치화시킨다. 

6.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행동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사회복음이다. 사회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에 대한 공적 옹호자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주 이것은 정치적 행위에 관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보주의 이론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그후에 사회복음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해방신학으로 그 모습을 바꿨다.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경제 체제에 관심을 갖게 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혹은 신마르크스주으나 그보다 부드러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들)가 해방신학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다. 그 후에 해방의 메시지는 압제받는 모든 이들(여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을 해방시키는 메시지로 확대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얼마간 사회복음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해방신학이 교회를 탈중심화시켜 정부의 진보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보수적인 정책들이 그와 반대되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보수적인 해방신학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코 불공평한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문화 전쟁의 양쪽 당사자 모두가 콘스탄티누스에게 굴복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치적 영역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따라 작동하고 있다.

7. 그리스도 교회(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온 것이지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혹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8. 왕의 특성이 왕국의 특성을 결정한다. 예수의 "특성"은 그에게 사용된 호칭들(인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을 통해 드러난다. 그 호칭들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왕으로 등극한 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예수의 특성으로 인해 십자가 모양을 닮는다.

9.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예수가 구속한 사람들, 즉 죄에서 구원을 얻고, 우주적 세력에게서 해방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조직적인 악을 정복하는 백성들이다.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다. 따라서 오직 구속을 얻은 사람들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다.

10.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성서가 "세상"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자신들과 세상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한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의 용법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이다. 요더는 세상을 "구조화된 불신앙"이라고 부른다. 특히 니버 이후로 세상은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에서 "문화 만들기"는 특별한 관심을 받는 기독교적 활동이 되어 있다. 오늘날 "문화"라는 단어는 세상 그 자체를 위해 세상을 개선시키는 데 사용되기보다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구속해 하나님 나라(교회) 안으로 이끌라는 하나님의 소환 명령을 감추어버리는 가면으로 너무나 자주 사용된다.

11. 하나님 나라 신학은 최후의 심판을 믿을 뿐 아니라 그 미래의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불의한 현실에 대해 알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갈망한다. 그 심판은 죄를 종식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다.

12.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십자가를 닮은 의와 사랑의 삶이라는 특징을 지닌 도덕적 교제를 나눈다. 그리고 이 삶의 평화와 소유를 포함해 삶의 모든 차원으로 스며든다. 

13. 하나님 나라를 교회와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대한 개입 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캍으 일들에 대한 개입을 재정의해준다.

  • 지역 교회 안에서 대안적 공동체 만들기

  • 마태복음 5"13-16이 말하는, 그러나 특히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랑스러운 공동체 만들기. 그리스도인들의 공적 행동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의 "흘러넘침"이다. "선한 일"을 하면서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따라 사는 데 실패한 것이다.

14.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곧 교회의 사명이다.

  • 복음전도

  • 예배

  • 교리의 전수:지혜

  • 교제: 사랑

  • 교화: 옹호

  • 제자도: 양육

  • 선물: 성령의 분출

15. 하나님 나라의 일이 발생하고 행해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제자들(하나님나라 백성들, 교인들)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수행하는 지역 교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