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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사도행전-박영선 목사

7. 억울함을 받아들이다 / 1 처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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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5장 17-32절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사도행전 5장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건을 만납니다. 이 사건이 놀랍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결과로 생겼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자랑할 만한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로 인해 부정적이고 곤란한 결과를 받게 되었다는 차원에서 놀랍습니다.



예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라는 한 개인의 이름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실존 속에 들어오신 역사적 사실, 하나님이 그가 만드신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도망간 자리까지 쫓아 들어오신 구체적 사실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만 도에 관한 것도 아니고 소원에 관한 것도 아니고 다만 치성과 진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어떠하심이 가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관한 증언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요 우리가 자초한 죽음의 자리까지 쫓아 들어오신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기독교가 가지는 신앙 고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도망쳐서 자초한 멸망의 자리에 있는 모든 인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힘을 다하여 찾아 들어오시고 정성을 다하시고 능력과 진심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심에 있어서 그가 가진 진심과 능력과 성의를 다 동원하였는데, 그것은 세상이 알고 있는 권력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그들이 거절하고 배반하고 죽이는 그 방법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기적과 신비와 이해할 수 없는 은혜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수의 이름에 묻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 우리가 나무에 못 박아 죽인 예수로 하나님은 그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제자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이해는 다만 어떤 신앙적인 헌신과 비장함과 장렬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이해한 기독교인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희생이 아니라 순종

 

그가 메시아일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으로 예상하는 모든 방법과 다른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가 와서 일하신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불러 일하실 때 세상 앞에 ‘예수 믿는 거 봐라’ 하고 자랑할 만한 것을 안 주신다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교회는 자기가 존재하는 시대의 사회와 세상 앞에 도전을 받습니다.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고 하는 타협의 위협과 시험을 당하고, 동시에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잘해도 욕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다른 무엇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말을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예수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방식, 신앙을 가지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부름 앞에 순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입기 전에는,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과 화목과 교제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로 그 세상을 꺾지도 않고, 그 세상을 항복시키거나, 그 세상에서 호감을 받는 방식이 아닌 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겐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우리가 능욕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말도 그 자체로 성립을 하지만 이 희생과 순종은 엄밀하게 보자면 다릅니다. 희생이라는 말 속에는 내가 나의 권리를 포기했다, 그래서 손해를 자초했다는 가치가 크게 부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희생하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치가 이런 마땅한 권리,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여 가지는 덕목으로 이해되면 큰일납니다. 예수님은 희생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길로 가셨습니다. 그 순종이 희생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들이 능욕 받는 길로 인도함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순종하는 길로 이해하고, 능욕, 오해, 억울함 같은 것들은 문제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강조된 이것,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어 우리의 거부와 반역과 모욕과 죽임을 감수하여 그것을 뒤집어엎은 반전, 바로 부활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그리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순종, 오늘 읽은 사도행전 분문 식으로 이야기하면 “능욕”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자기의 죄와 권력으로 예수를 죽이는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 들어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살하신 것이 아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한 자리, 능욕의 자리입니다. 오해받는 자리입니다. 그 길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증거가 부활입니다. 그 부활을 만들어내는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그들은 능욕 받는 일이 이제 겁이 안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붙드심


그러니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예수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허락한 구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는 그 이름입니다. 그러니 그냥 죽으십시오. 죽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그냥 죽어버리십시오. 병신이 되십시오. 각오 같은 것은 하지 마십시오. 순교란 장렬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병신이 돼서 죽습니다. 그것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죽어 나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그가 믿는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저가 스스로 속아서 저 자리에 온 것같이 그렇게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가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명예요 기적이라는 것을 초대교회가 알았고, 그 유산 속에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인가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모든 기도에 하나님이 한 번도 답을 안 주셨는데도, 하나님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이해관계와 다른 모든 조건을 떠나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선택이기 이전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신비한 하나님의 붙잡으심으로 우리가 여기에 붙들려 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붙잡아 낸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광스럽다거나 자랑스럽지 못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게 붙잡혀 와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네가 알겠느냐? 내가 어떻게 사망을 뒤집어 거기서 생명을 다시 만들어내는 줄 알겠느냐? 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단다. 내가 베푸는 것은 은혜요 자비요 긍휼이요 용서요 구원이요 능력이란다. 왜 네가 내 편을 들고 나를 도우려고 하느냐? 내가 내 아들을 보내어 어떻게 일했는지, 내가 이렇게 분명하게 세상 역사와 성경 속에 밝혀놓지 않았느냐?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가 매일 사망에 넘겨집니다.
죽으라는 겁니다. 쌀이 떨어졌습니까? 굶으라는 겁니다. 병이 나셨습니까? 아프라는 겁니다. “아니, 이래가지고 뭘 하라는 겁니까?” “내가 한다. 두고 봐라.” 그 싸움을 합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존재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그 위협 앞에서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먹고 살고 하루를 버티기 위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을 감당하고 성의를 보이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보듯이 허탈함, 억울함, 낙심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내가 한다. 그것으로 내가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행전 5장의 선언입니다.

우리에게 넘겨진 기독교는 나라가 가르친 것도 아니고 무슨 훌륭한 사람들이 가르친 것도 아니고 죽어 넘어간 사람들에 의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신자의 자기 정체성과 우리의 인생과 현실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승리를 하십시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런 것은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처한 자리는 하나님이 정한, 붙드시고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에게서 부활의 승리를 만드신 그 능력으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실 것이요,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결국 꿇게 하실 것입니다. 그 힘 있는 신앙의 승리가 여러분에게 허락되어 있는 것을 아는 감사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제자들의 고백에 동참하시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사는 귀함과 자랑과 능력과 그 기이함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헌신과 희생과 소원 속에 일하시는 것보다 크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일하고 계시고,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그 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시고 있는 우리 각자의 자리요 인생인 줄 알게 하시옵소서. 저 제자들에게 허락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씀을 아멘으로 받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