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3장 1-10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두 가지 기적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또 이스라엘 백성의 거부가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 3장의 중요한 논제입니다.
사도행전은 논리적인 진행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의 진행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초대교회에 그리고 두고두고 하나님이 일하실 모든 교회에 알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복음의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부재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임재였다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재입니다. 그가 승천했지만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대신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의 강림은, 이 세상 역사가 그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끝판에 다가와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하듯이 스스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주권자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런 충격적인 선언을 빼놓고는 말세라는 말은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상이 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격이 아니며 의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가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이 세상의 끝을 당신의 계획과 뜻 가운데 작정하고 계시다. 그 끝판을 향한 마지막 증거가 성령 임재다.’ 이것이 요엘 2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강림을 실제로 초대교회가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계획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시간이요 과정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세계와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인류를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로 하셨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창조의 완성을 성취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셨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은 종말의 최종적 증거입니다. 동시에 그 증거자, 성령은 그 종말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성취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기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고 합니다.
정상으로의 회복
그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회복입니다. 보통 사람, 정상적인 사람에게 어떤 초월적인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상이 아닌 상태에 있는 사람을 정상으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구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목표로 지은 인류를 원래 목적답게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구원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멸망과 실패, 사망의 자리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원래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존재로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적에 들어있는 진정한 초점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야기하고 나면 마지막에 꼭 무슨 권면이 따라오는가 하면 바로 회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지 않으면, 다시 말해 정상적인 자리에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과 뜻이 성취되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심판과 멸망과 저주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구원에 관한 설명이고, 또 마지막에 회개가 촉구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 아들의 죽음이 우리 스스로 벗어나서 자초한 멸망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배척했을 뿐 아니라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낸 아들을 죽여 버린 자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이 한 대로 갚지 않고, 우리가 한 것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그의 구원의 목적과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능력은 은혜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로운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거부하고 반대하고 발악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거기에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기대도 하지 않고,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은 일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를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당신의 자녀라는 신분과 인생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운명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시작된 표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신약시대의 복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누리는 복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복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다고 합니까? 정상으로 돌이키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자가 된 것은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입은 신분과 정체성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얼마나 많이 성취하는 인생을 사느냐 하는 세상의 잣대에 묶여 있지 않고 고급한 영원한 가치의 존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자유와 특권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오셔서 죽고 부활하여 그의 영을 보내사 이루고 허락하고 우리가 믿어 고백하여 가지게 된 현실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라볼 때 이 능력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밖에서부터 온 구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입니다. 내가 가치 있고, 무엇을 잘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함으로써 유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거부하고 우리가 원치 않았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됐다니! 영생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말이 되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참 성도입니다. 훌륭한 성도입니다. 이 크고 비교할 수 없는 이것을 다른 작은 것과 비교해서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누구인가, 구원이 무엇인가, 능력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것을 받은 자로서의 확인과 감사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땅 끝까지 가라. 제자를 삼으라.’ 물론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께서 주시는 명령이요,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떠밀려갈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신앙인이 된 현실에 대하여 늘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게 예수 믿는 게 맞나? 하나님이 정말 그 아들을 보내신 구원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답답함 속에 있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했던 예수
예수께서 오셨을 때 아무도 그를 메시아라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권세를 두르고 오시지 않았답니다. 아무도 그가 그렇게 중요한,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분인 줄 몰랐답니다.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오셨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거부와 외면과 죽임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성품과 직결된 용어로 쓰인 능력입니다.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13). 베드로의 설교의 일부분인데, 그의 볼품없는 성육신, 죽임을 당하시는 그 고난들로 일하셔서 이루셨습니다. 그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과 그 목적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잘것없음, 실패, 막막함, 한계, 묻혀 있는 것 같은 상실된 존재감, 또는 그런 자리 같은 것들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신자의 특권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가 무슨 뜻입니까? 어디까지 밀리던지, 땅 끝까지 쫓겨날지라도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걱정 마라, 그렇게 읽으십시오.
은과 금은 내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자기 자리를 지켜라! 복된 인생을 살라!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미천한 것, 우리의 볼품없는 것, 우리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 예수님 안에서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자리, 어떤 경우,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축복받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 믿음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우리 인생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있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 기적도 반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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