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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21. 빌닷과 욥_하나님의 높으심을 달리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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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2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 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27:1 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 (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7 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 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 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 11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 (욥 25:1-27:23)

천둥같이 일하시는 하나님

욥기는 시편 103편에서 본 바와 같이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절)라고 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의로우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라합, 리워야단, 날렵한 뱀은 다 악한 세력을 상징합니다. 26장 12절, 13절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할 세력은 없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를 보여 줍니다. 아무리 큰 세력일지라도 하나님이 넉넉히 무찌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당한 일은 분명히 인과응보의 법칙과는 다르다.

이렇게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지금 내게 일하고 계신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입바른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지금 벼락을 맞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당하는 일을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너희가 이해 못하듯이 나도 이해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하심과 의로우심이 분명한 것같이, 나에게 일어난 일도 하나님이 완성하실 일이다. 나는 맹세할 수 있다.’

‘너희는 옳지 않다. 너희는 반밖에 모른다. 너희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이야기하지 마라. 나는 이 일을 잊어버릴 수도 없고 없었던 것으로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던 하나님보다 더 크시더라. 어떻게 크신지는 모르겠는데 나를 뚫고 들어오셔서 말씀하시며 나를 붙잡고 있다. 도망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멀리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내 영혼을 뚫고 들어와 하신 말씀이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헛되거나 거짓되지 않다. 내가 엄살을 부리거나 억지를 부리거나 반대해서 그 일을 거스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친히 겪고 있다.’





욥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그들이 다 알고 있다는 하나님, 그들이 경험하고 이해한 하나님보다 욥이 경험한 하나님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이스라엘의 선택, 출애굽, 바벨론 포로, 예수의 오심 등 이 중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쉽게 안심하려는 것을 넘어서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보다 훨씬 단순하게 타협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욥은 지금 그렇게 점점 크게 걸어서 하나님에게까지 갔습니다.

여기서는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나를 선대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맹세입니다.

‘그래, 내가 그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면, 내 의를 물리치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시는 전능자시다.’

어떻게 그런 하나님이 욥의 입에서 맹세의 근거로 등장할 수 있을까요? 시편 119편 7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무엇이 성실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그이니’(사 43:13). 여기서 말하는 ‘나는 그다’라는 말은 ‘나는 늘 그였다. 즉 공의롭고 전능하고 성실한 하나님이다’ 하는 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는 ‘하나님이기를 중단하실 수 없는 분’,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늘 하나님이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욥기는 우리가 원하는 간단한 종교,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신이 될 것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선에서 타협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고난이 옵니다.

욥은 어떤 하나님을 두고 맹세합니까? 욥에게 가장 궁극적인 권위, 궁극적인 가치, 그의 존재와 운명의 기반이 되는 주인을 불러서 맹세의 근거로 삼습니다.

자기의 근원을 계속 찾아가면 맨 끝에 누가 있습니까? 제일 맨 끝, 가장 큰 근거와 운명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같은 권세와 같은 주인을 놓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이 높으시다고 하는데, 욥은 같은 하나님을 두고 ‘그 하나님은 나의 의를 물리치시고 내 영혼을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전능자다. 그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틀리지 않았다. 내가 겪은 이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너희가 말한 영역을 나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시다’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욥기 27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2절입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욥은 지금 하나님을 가장 궁극적인 권위와 근거로 두고 이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욥의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입니다.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가 맹세의 근거로 제시한 하나님에 의해서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있는 한 그가 하는 이 맹세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잘잘못이 아닌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어 일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마음 놓고 인생을 신앙에 맡길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욥을 고난으로 이끄는 것은 시편 119편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서움입니다. 잘잘못을 가리는 무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무서움입니다. 우리는 거듭해서 쉬운 길로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이제 배웁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신 것은 죽음으로 끝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죽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죽는 것이 더 쉬운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가치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이 더 쉽고 고통이 더 어렵습니다. 그 고통의 자리에서 욥은 하나님이 단지 우리가 존재하느냐 마느냐를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에 응할 때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드디어 발견합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낳으셨는지 보십시오. 좋아하고 싫어하고 후회하고 고집부리고 배신하고 애걸하고 복걸하고 아양 떨고 웃고 우는 존재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와야만 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할 때도 같이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왜 이런 하나님을 모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훨씬 깊습니다. 늘 기적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심 속에 있습니다. 나의 외로움, 나의 간절함, 나의 처절함, 비명, 절망, 막다른 곳에 다다른 느낌, 끝장나지 않고 그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이 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런 것이 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지극하심이라는 말입니다. 욥이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의 궁극적 주인이요 권세요 진리요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에 의하여 내가 살아 있고 고생하고 있고 비명 지르고 있다.’





실패할 수 없는 존재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체질과 본성과 능력이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뜻입니다.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면 당연히 눈물이 나듯이 인생의 체질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변덕, 우리의 실패, 우리의 연약함까지 다 포함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 서 있는 자리, 처지, 상황은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일하시는 현장입니다.

주께서 나의 내장을 지으신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패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의 완성으로 끌고 가신다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면 절망할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 욥이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성실하신 분이 아니었다면 진작 우리를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죽이면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비극으로, 혹은 공갈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무한한 자유와 감사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 감격으로 각자의 삶을 사십시오. 진정성을 갖고 사십시오. 너무 털어 버리지 마십시오. 너무 결벽을 떨지 마십시오. 물론 도망가거나 무책임하게 굴지 않아야 하지만, 거기에만 너무 붙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신데 그 무엇이 주의 통치에서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실패와 세상의 위협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놀라움입니다. 해가 뜨는 것같이, 비가 오는 것같이, 바람이 부는 것같이, 그리하여 곡식을 여물게 하는 것같이 우리 인생이 주의 뜻을 이루어 완성되게 하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시는 오늘입니다. 그리고 내일일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인들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로마서의 고백을 우리의 것으로 갖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