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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19. 욥_ 하나님은 뜻이 일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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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 (욥 23:1-17)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반드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적당히 봐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잘못을 눈감아 주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일,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나님이 가진 의지와 지극하심을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적 배경을 가지고 이해하면 예수 외에 다른 구원자의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 확인

성자 예수님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십니다. 그 고난은 욥이 당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두려움과 복종으로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신뢰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결정권을 하나님에게 넘겼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 앞은 무엇이었습니까?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맡겼습니다. 경외하심으로 맡겼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손에 맡겼습니다.

욥의 고백이 동일한 맥락 속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배웁니다.



죽음보다 큰 인간 존재

순종이란 다만 내 뜻을 접고 나를 복종시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의 진정한 내용을 내가 채우려고 하던 자세에서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인간의 최고 경지를 포기하고 신의 은혜가 허락하는 경지로 자신을 넘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죽음입니다.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쳐 기존의 내가 죽어 넘어가야 비로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맡길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의지의 문제도, 이상에 관한 소원도 아닙니다.

세 친구들의 이야기에는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의 극치에 불과합니다. 욥기는 그것을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친구들이 말하는 원칙으로는 그것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욥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또 세 친구가 계속 등장하는 것도 한계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욥의 고백을 들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은 다만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중단, 의심의 중단, 불안의 중단에 불과합니다. 중단하는 대신에 그는 생각했습니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죽음보다 큽니다.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싶다. 그리하여 근심과 불안 속에 기쁨이 있음을 알고 싶다.’ 이것이 인간 정체성의 한 면모입니다. 삶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기에 살아 있는 동안 마음껏 욕심을 부려 보는 정도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욥기의 무시무시한 증언입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그냥 죽이시면 쉬울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고단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답니다. 타협하지 않으시겠답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분,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정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타협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길은 고단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만족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길로 예수를 부르셨습니다. 그 길은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더 깊고, 더 놀랍습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 길을 예수님이 걸어가셨습니다. 욥이 걸어갔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손길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바다 위를 걷기 소원했던 베드로에게처럼 우리에게도 길 없는 길을 걸어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의지하여 말입니다. 이것이 욥기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런 인생인 줄 알고 희망을 가지십시오. 믿음을 가지십시오.





기도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길이 안 보이고 답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뜻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절망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능력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 아들이 울고 통곡한 것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