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롬 10:14-21)
믿음으로 누구든지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으로 구원이 넘어갔다, 이 구원은 아무것도 아니며 무지한 상태에 있던 이방에게 허락된 은혜이다, 이렇게 무지한 자에게도 구원이 허락되었으니, 알지만 거부한 이스라엘에게도 은혜가 승리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이다, 라고 단언합니다.
‘누구든지’는 ‘누구라도 괜찮고 아무라도 좋은’이라고 무한히 열어 놓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믿음으로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이런 내용을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습니다. 이 ‘누구든지’는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율법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시사해 줍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말이 그랬던 것같이, 우리가 사는 인생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질문은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온 것임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밖에서 온 이야기입니다. 누가 보내서 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까? 보내신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쫓아가서 만난 분이 아니며 우리가 지하에 내려가서 끌어올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근거이시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선언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럴 줄 아시면서도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보내시고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신 후에 구원이라는 결과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죽인 우리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감싸 안아 부활로 반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고 구원받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내가 한 짓이 무엇인지, 예수가 무엇을 이루어 주셨는지를 깨달아 통곡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이 전에는 얼마나 패역한 존재였는지를 알고, 이제는 누구의 품에 안겼는가를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강요로는 회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품에 안기기 전에는 무엇을 갖다 대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상대에게 그가 얼마나 못났는지를 일깨우고, 절대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설명해 보아도 결코 회개하지 않습니다. 아니 회개하지 못합니다. 생명으로 들어와야 그 첫 열매로 회개가 터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신 예수
이스라엘 백성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자기네 마음이 변할까 봐, 자기네 자부심이 무산될까 봐, 자기네가 알고 있던 것이 틀렸을까 봐, 계속 고집을 부린다고 합니다.
거부하는 백성들, 말 안 듣는 백성들, 자기들의 고집을 세우기 위하여 기를 쓰고 반대하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신 후에 우리가 믿는지 안 믿는지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듣는지 안 듣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일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고 반대하고 고개를 돌리고 기를 쓰고 반항하는 이들에게 주께서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또한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위가 아닌 것, 하나님이 작정하셔서 당신의 은혜와 능력과 성실로 밀어붙이신 것,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복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구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복이며 명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다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되어야 비로소 이 선택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자유가 주어집니다. 너는 내 백성이다, 내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복이며 명예인지 알고 그 인생을 살기 바란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책임이나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누구에게나 찾아가는 인생
성경은 예수가 죽으신 것은 우리라는 존재를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나를 따라 이 길을 걸어라, 거절하면 그것이 얼마나 큰 손해이며 비극인지 알아라, 그러니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나 없는 길을 간다면 내가 가만 놔두지 않겠다, 나 없이 가는 길이 어떤 비극인지, 그 길이 얼마나 허망하고 손해인지 내가 반드시 너한테 가르쳐 줄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우리의 반응을 뚫고 극복하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얻은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 내는 것이 자랑인지를 모르면 안 됩니다.
이 자리는 ‘누구든지’ 되는 자리입니다. ‘누구든지’란 아무것도 아닌 자를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 들어와 그의 반응과 이해와 결단이 있기 이전에 구원을 베푸십니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날 리 없다고 여겨지던 자리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나타나신 모습이 우리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오시는 이가 메시아일 리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죽어 버리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얼마나 굉장한 길인지 우리는 압니다.
이제 하나님은 ‘누구든지’를 위하여 ‘누구든지’를 보내십니다. 쫓기는 발이며, 목숨을 부지하려고 도망가는 발입니다. 복음은 그렇게 세계에 퍼집니다. 짓밟아서 보내십니다. 빈대떡 만들 듯이 맷돌에 갈아서 보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보냄 받은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보내어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찾아가십니다.
시간 속을 살아 내는 인생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가는 것, 제한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에 붙잡히신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붙잡히는 것이죠.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에 매이십니다. 만날 수 있는 자들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만나십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 곧 ‘누구든지’와 함께 일하십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부활을 만드십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서, 죽는 자리까지 순종하셔서 거기서 반전을 이루십니다.
어디서나 어느 조건에서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 할 만큼 힘든 지경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받으신 시험이 무엇입니까? 그 시험은 모두 시간을 초월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시간 속을 걸을 필요는 없잖아,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들어 줄 것이다, 내게 절하면 세상을 다 주겠다, 그냥 탁, 이렇게 바로 결론을 만들어라, 그러나 결과는 그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채워지고 구체화하는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생을 살아 내셔서 성취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길을 실제로 걸어오신 것입니다. 실제로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우리에게 우리가 걷는 인생이 결심이나 결단으로, 곧 말로 때우거나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의 삶을 실제로 살아 내십시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듯이,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르듯이 말입니다. 산을 오르는 것은 다만 올라가는 동작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올라가는 내내 자연의 경이를 봅니다. 이처럼 신자의 길을 살아 내는 영혼에 빛이 비칩니다. 이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 복음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자들이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도 손해가 아니라고 합니다.
고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인생의 어떤 짐을 지게 하시고 어떤 고난을 겪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며, 나를 실제적인 길로 밀어 넣으셨기에 생기는 흔적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구경만 하고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을 걸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이 길을 걸으십시오. 세상이 주는 위협은 사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을 뒤집으시고 반전하셔서, 이 속에 은혜를 베푸시고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십시오. 세상의 위협이란 너 편안하게 해 줄게, 라는 시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당신을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아가시고 묻지 않은 자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나를 이 자리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자와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보지도 않는 자들 앞에 나를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이 막막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세상 권력의 기본은 죄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보내시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우리가 그렇게 서 있습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내신다, 나는 찾지 않고 묻지 않는 자들에게 찾아가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손길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명예롭게 사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생명과 복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외면하면 사망과 저주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신 세상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를 보내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옵소서. 웃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충성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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