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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27.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_율법, 선택받은 백성의 명예 / 3부 그럴 수 없느니라(9:1-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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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9:30-10:4)



율법과 은혜의 문제

바울은 이스라엘은 당연히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부가 그들을 통하여 증거될 복음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으나 약속된 구원이 이방에게까지 넘친 것처럼 이스라엘의 배반과 거부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도 마침내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9장에서 11장에 걸쳐 바울이 설명하는 복음의 크기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렇게 크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할 때면 ‘율법이 아닌’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는 이제 율법을 폐기처분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이 은혜의 수단은 아니라고 하는 점을 기억하여 율법과 은혜를 조화시켜야 합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목표를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진정한 목표를 완성하셨다는 말입니다.

순서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율법을 준 다음에 “너희가 율법을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먼저 주어집니다. “내가 애굽에 대하여 행한 일과 너희를 불러내어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을 기억하라”가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지키면’이라는 문구를 조건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너희를 불러낸 것은 다만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노예의 자리와 세상의 더러움에 짓눌려 있던 자리에서 너희를 꺼낸 것은 너희를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고 너희에게 거룩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다, 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뒷부분에 나오는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 주어지는 명예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꺼내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그냥 다 지워버리고 표백하고 페인트로 덧칠하여 끝내시려고 시작하신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과 실존에 하나님의 그림을 그리시겠다고 시작하신 일입니다.



율법의 의도

십계명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로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충분하신, 홀로 충분하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홀로 주인이십니다. 이 말은 단지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광과 생명과 진리와 의와 가치와 승리와 모든 만족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분만이 이런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과목 중 하나를 담당하는 분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세상을 다스리시기에 충분하시다는 것이 십계명의 앞부분입니다.

너의 필요를 네 이웃에게서 빼앗아야 할 만큼 너를 가난하게 놔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너와 네 이웃의 쓸 것은 하나님이 채우신다, 그러니 너는 넉넉하게 살아라, 하는 것이죠.

율법이란 우리가 지켜서 구원을 얻는 조건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그것은 놀라운 부름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는가에 대한 요약이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아주 세밀하고 자상한 설명입니다.


예수 없는 믿음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으로 자기 의를 강조하느라고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목표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영광으로의 부르심을 놓친 것같이, 이제는 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율법을 대신하여 조건으로 사용됩니다.

로마서는 이미 완료된 구원이 시간상 역순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을 부르기 전에, 예수의 필요를 알기 전에,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는 그때 죽으셨습니다. 이천 년 전에, 우리가 예수를 알고 말고를 떠나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구원이 완료된 것입니다.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은 이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서 지금에 와서 번복하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태어납니다. 여전히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습니다. 새삼스럽게 예수의 필요를 압니다. 이런 우리 각각에게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방황하고 의심하고 거부하고 결단하고 이해하는 모든 과정을 겪어 결국 우리가 마음으로 항복하는 과정을 허락하십니다.

구원의 시작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확인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내가 이룬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를 때에 하나님이 구원하셨다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의 법칙이 아닙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그때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신적 방법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은혜’라고 합니다.

믿음을, 남을 공격하고 정죄하는 무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고도 예수를 거절했던 것처럼, 신약 시대의 교회는 믿음이라는 것을 들어 예수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모두를 기다려 주시며, 인간이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지적하기 위하여 믿음이란 말을 쓰면 안 됩니다. 믿음을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시편 51편은 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짓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려놓지 않고 나를 고쳐 놓지 않으면 저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시온에 선을 행하소서,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소서,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이 쌓아 주소서, 우리가 쌓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시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예수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점이 교회와 정치의 차이입니다. 정치는 증상을 개선하는 일에 힘을 쓰지만 교회는 근본을 고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타인을 기다려 주고 알아가는 일이 이것보다 커야 합니다. 죄의 증상을 개선하는 것을 넘어서서 복음의 핵심으로 들어오는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밖에서 교회를 보고 역시 교회는 세상과 다르더라, 저 곳에는 보복이 없고 정죄가 없더라, 오직 교회에만 용서와 기다림이 있더라, 이렇게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러 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서로를 향한 조언이 예수라는 이름과 결부되어 있는지, 아니면 분리된 채 심판을 위한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맺혀지는 열매

예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당신께로 인도하시려고 세우신 유일한 방법이자 문이며 내용입니다. 그 어떤 명분이나 유용함이나 덕목도 예수 없이 쓰인다면 이는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 없음이기 때문입니다.

강조점은 성령의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가 나에게 열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무의 열매는 당연히 그 나무의 가지에 달리듯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당연히 성령이 맺으신 열매입니다.
우리는 해서 받았고, 저 사람은 안 해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예수는 누구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까? 자기 증명을 하려는 자들에게는 예수가 걸림돌이 됩니다.
자신의 지위가 얼마나 굉장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지위와 명예로 부르셨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이든, 믿음이든, 사람을 잡는 데 씁니다. 그러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데 써 보십시오.
이웃을 해치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 삼켜진 존재같이 되어 그들을 살리십시오. 그렇게 멋지게 감당하여 여러분의 명예를 확인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율법도 예수도 여러분에게는 걸림돌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자신의 영광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으로 당신의 영광을 증언하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명예와 자랑이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믿음의 가치를 깨달아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억울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 어느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과 승리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의 고난이 우리로 섬기는 길을 가게 하여 우리 이웃도 품어 주는 길을 가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멋지게 감당하는 우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