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14-29)
성경이 말하는 선택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그 가문의 여느 이들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꼭 아브라함이 아니어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아니라, 아브라함의 동생이라도 되고 아브라함의 친구라도 되고 아브라함의 삼촌이라도 괜찮습니다. 그의 가족 중 누구라도 상관없는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도 친척도 없이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자격과 조건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이삭은 그 자신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씨를 품고 있는 약속의 자녀라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그러면 선택은 무엇을 차별하고 무엇을 비교하는 것입니까? 사울과 다윗의 대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울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와 운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인생은 영원한 승리가 약속되는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하자마자, 하나님은 그를 무릎 꿇리고 배우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자리가 다윗에게 허락된 약속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놓치면 우리는 선택이라는 단어를 오해하게 됩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주인인 아버지 하나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이 은혜를 베풀기 위한 찾아오심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열을 나누거나 호불호를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이자, 그의 의지입니다. 이 의지는 어찌나 강한지 인간이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은혜라고 칭하는 이유는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은혜는 보상이 아니며 대가가 아니며 우리가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로마서 내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 은혜입니다. 다함이 없는 은혜, 베풀고 주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적게 일한 자에게 더 주는 것이 나의 은혜이고 나의 의로움이고 명예이지 어찌 그것이 불공평한 것이겠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주인이 먼저 온 이들을 괄시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온 이들이 주인을 원망한 이유는 주인의 크심 곧 하나님의 크심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그 주인은 복된 일을 시키는 분이시며 인간을 가치 있게 쓰시는 분입니다. 더구나 그분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이십시오. 예수를 믿어 무엇이 다른지를 보이십시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아버지란 어떤 아버지입니까? 작은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재산을 떼어 주어 들려 보낼 수 있는 아버지, 돌아오는 것을 언제든지 받아 주고 따뜻하게 맞아 주는 아버지, 맏아들이 “나는 열심히 섬겼는데 왜 아무것도 안 주십니까? 정말 이러시깁니까?”라고 못나게 항변하자 “너는 왜 그렇게 못나게 구느냐”고 꾸짖지 않고 오히려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좋은 말로 타이르는 아버지입니다. 저는 이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버지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쩨쩨하게 굽니다. 나갔다 돌아온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고, 집을 지켜 하나님의 아들로 산 영광은 모른 채 늘 불평합니다. 하나님! 어째서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이 더 잘 살고 편안합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만이고 시편 37편과 73편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살았던 시편의 저자가 불평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의 뜻
바로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일에 대적한 자 곧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나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바로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가 지옥 갔냐, 천국 갔냐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와 애굽을 죽이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이 등장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악역을 맡은 자들을 다 없애면 영화가 안 됩니다.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일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다 착한 배역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텍스트를 깊이 담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입니다. 왜 내가 이 조건과 환경 속에서 요 모양 요 꼴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구체적 역할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마음껏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너희를 바보인 채로 끝내지 않겠다, 그렇게 쉽게 끝내지 않겠다, 네가 비명을 지른다고 해서 나는 너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게 목적한 것을 이루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겠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절대적 조건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자들이다, 선택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인생이라는 뜻이다, 선택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는 개입하고 누구에게는 개입하지 않고의 차별이 아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자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드러난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성의와 의지를 보라, 이스라엘 중에서도 결국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여기서 남은 자란 다수가 아닌 적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성의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저들이 전부 배신한 것으로 보이느냐, 그 속에 하나님이 남기신 자들이 있다, 그것은 너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느냐, 너희에게 언제 예수 믿을 역사적 유산이 있었느냐, 이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신앙적 유산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인데, 너희도 구원을 얻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들을 얼마든지 기다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드러내실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실 자들을 가장 나쁜 조건에서 뒤집어 그 영광의 크기를 나타낼 수 있지 않느냐, 이 하나님을 기억하라, 이것이 남은 자란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서 있는 자리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붙드심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의 감옥이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이 감옥에서 낙원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옥이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을 갖게 됩니다. 믿음, 사랑, 웃음, 희생, 섬김이 생겨납니다. 이는 보상을 위한 조건이 아니고 윤리적 확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현실에서 실제로 드러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너희는 두려움의 자리에 서 있지 않고 은혜의 자리에 서 있다, 예수 안에 있다, 그의 피로 화해한 자리에 서 있다, 그러니 겁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맞습니다.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아버지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약속과 성의를 예수의 십자가로 증명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경이로운 경륜과 인도를 여러분 각자의 생애에 붙들어 매십시오. 자랑할 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물과 한숨 속에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막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고 타협하시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는 지극한 성의이며 사랑입니다.
기도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못난 것과 무지와 실패와 거절을 뒤집어 당신의 영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 삶의 막막함과 무지함이 손해로 끝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 울 수 있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우리가 심지 않은 것까지 갚아 주시는 하나님,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 존재가 되게 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으니 이 위대한 믿음 가지고 살게 하소서. 승리하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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