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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23. 모든 것이 합력하여_성화, 예수와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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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6-30)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성령의 탄식은 대강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표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추겨 채찍질하고 노력하여 도달하는 결국을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능력이나 책임의 한도를 넘어선 어떤 운명을 분명히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이라든가 ‘열심히 기도하면’과 같은 우리의 진정성이나 성의를 조건으로 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범위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28절의 ‘모든 것’에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 우리가 미처 살아내지 못한 것까지 포함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미리’라는 표현에서 우리의 이해, 우리의 결단, 우리의 노력, 우리의 업적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보상이나 심판을 받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의지가 언제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지는 시간상으로도 언제나 우리를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죽으신 예수’에서 보듯이 복음의 운명적 승리를 미리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들’이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아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나의 뜻과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안다, 이런 뜻입니다. 또한 그가 우리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정하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현실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요?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된 자리에 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 없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됨’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지위와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승리의 자리, 영광된 자리에 갈 것입니다.

이를 완료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전부 완료형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우리의 운명이며 현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신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셔서 시간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풀어 말하자면,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되고야 말 하나님의 작정과 의지와 약속 가운데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목적지가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없다, 결코 하나님은 타협하시지 않는다, 라고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이 추락했더라도 그 추락한 자리에서 목적지로 이어 나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 삶을 이어 나가시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성화관

개혁주의는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화에는 진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여기가 잘 이해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무엇일까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성화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새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화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어떻게 되었는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도 죽어서 죄로 살던 존재와 신분과 지위가 소멸하였다, 그의 죽으심과 함께 죽은 우리는 그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삶을 산다, 이제는 새 삶이다,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화는 악역을 맡았던 어떤 배우가 그 드라마를 끝내고 다른 드라마에서 훌륭한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엇이 진전되었고 무엇이 성취되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역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신분이 다른 새 드라마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화란, 결국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드라마에서 나 홀로 살아가고, 나 홀로 모든 책임을 지다가 망하는 그런 배역을 맡다가 가치 있고 신비롭고 명예로운 배역을 맡게 되는 영광스러운 드라마로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더럽게 살던 인생을 청산하고 깨끗하게 사는 정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종교적 차원에서 비교하지 말고 존재와 지위라는 차원에서 비교할 줄 알아야 성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지위와 신분으로 사는 것이 성화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지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고마워하는 이유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나는 궁핍하거나 풍부하거나 아무래도 좋은 경지에 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나는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 라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무슨 꼴이든지 당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서든 동일하게 일하신다는 것을 나는 안다, 풍부함 속에서 하실 수 있는 것을 궁핍함 속에서도 하실 수 있고, 형통함 속에서 하실 수 있는 것을 곤고함 속에서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나는 주인공일 뿐이다, 나를 책임지는 것은 작가이신 하나님이다, 그분이 함께하시는 한 나는 무슨 꼴이라도 당할 수 있다, 이렇게 답하는 것입니다.

누적되어 충만해진 인생

‘문학과 독서의 효과는 발전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적적이다’.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다고 합니다.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보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이 어떻게 충만해지는가가 성경이 더 주목하는 신앙의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부족해서 곤고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열등해서 고통을 받거나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에게 충만히 주신 것을 각각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채우고 누리는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인 성육신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신 성육신입니다. 복음을 하늘에다 쓰지 않으셨습니다. 성육신은 예수께서 실제로 채찍에 맞고 못 박혀 죽으심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이요, 성의요, 의지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소 살아 내어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로 때우고 주문으로 때워 생각 없이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얼마만큼 이해하고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예술이 되기도 하고, 푸념이 되기도 합니다. 분노가 있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은 아직 멀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가를 설명하러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주저리주저리 기도를 엮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친히 피 흘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상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약속입니다. 타협하지 않겠다, 기어코 모든 것이 다 유익이 되게 하겠다, 그런 뜻입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굳이 불만일 필요가 있는가’
《대망(大望)》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그러니 여러분, 웃으십시오. 명예롭게 사십시오. 복음이 복음인 이유와 십자가가 능력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책임 있게 살라

아직 오지 않은 이 영광은 취소되거나 변개되거나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자고 합니다.
영광스러운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인 현실을 하나님이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소망은 신자의 운명 곧 영광의 목적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완료된 과거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예전에 시간의 역순을 언급하면서 이는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화의 길에 들어왔으며, 결국 영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것입니다. 성경은 잘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은 책임 있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책임 있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너희의 삶이 하나님의 성실한 손에 있다, 그러니 넉넉하게 살아라, 걱정 말고 울어라, 삶을 맘껏 향유하고 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외면했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주실 정도로 은혜를 베푸신 분이신데, 하물며 우리가 이제 그를 믿고 아는 차원에 있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이 가능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만일 여러분의 인생이 이 말씀으로 답이 되지 않으면 다른 답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들게 현실을 바꾸어 주는 답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시고 목적하시는 역사와 인생과 존재의 목적지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명예롭지 않고 감사하지 않다면 다른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성실한 의지인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복주심의 결과요 과정인 것이 분명하다면 여러분에게 약속된 미래도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위로를 얻어 소망과 믿음을 가지며 감사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인생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고, 매일 자책하고 한숨 쉬는 일이 반복되지만, 이 모든 것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더 깊어질 것이며 분별과 통찰을 더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와 예수 안에서의 약속을 신뢰하는 가운데 우리는 크기와 높이와 넓이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있습니다. 믿음의 자랑과 기적과 감사가 지나가는 세월 속에 누적되고 충만해짐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시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복된 명예를 알며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