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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22.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_정황, 본문을 만들어 내시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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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18-27)





고난으로 채워지는 시간

자녀는 일꾼이나 노예의 신분과 대조되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꾼에게는 단지 일한 보수를 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자녀는 다릅니다. 자녀에게는 보수를 주지 않고 기업을 물려줍니다. 자녀는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지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기업과 유산을 이어받는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기업과 유산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소망’은 무엇을 바라고 내다보는 행위가 아니라 목적지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구원에는 시작부터 완성까지 시간적 길이가 있으며, 완성이라는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은 고난과 환난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당신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겠다는 목적을 고난을 통해 성취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은 예수가 법칙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점을 가리켜 줍니다.



고난과 정황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자 가장 기뻐하시는 방법은 예수와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완성하시어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방법도 고난으로 정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고난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난에도 불구하고’가 아닙니다. ‘고난으로만’입니다.

예수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하십니다. 십자가, 수치와 고통, 그리고 죽음입니다. 죽음을 맛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죽음은 최악의 상황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입니다.

성경적 이해로 보면, 죄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상태이고 이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생명과 진리와 승리와 영광의 근거가 없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 의미에서 죄란 하나님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죽을 자리로 스스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까지 찾아들어 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고난입니다.
우리가 만든 비참한 현실에 예수가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모양으로 놓아두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체를 키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랍니다. 키가 크고 체중이 늘고 지능이 늘고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리고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철학과 사변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을 삶에서 너무나 충분히 확인하게 됩니다. 나의 한계가 무엇인가, 내가 어디에 속했는가,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가 무엇인가를 이때 배웁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예수를 넣어주십니다.

생명과 진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이 점을 주시하지 않으면 컨텍스트를 바꾸는 싸움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정권을 바꾸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놈들은 다 죽이고 고함을 지르고 분을 내는 것만 있을 뿐 텍스트를 지켜내는 싸움은 없습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서 배우는 것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고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환경이 나빠서도 아니고 우리가 무력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 속에 보내시며 이것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황 속에서도 만들어지는 본문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거부하여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의 자리에 주께서 들어오셔서 그가 속한 컨텍스트에 텍스트, 곧 본문을 담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란 결국 본문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현장인 것입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합니다. 이 본문을 의역하면 ‘이 보배를 질그릇 같은 삶에 가졌으니’입니다. 우리의 정황은 보잘것없습니다. 우리의 지위나 능력이나 영향력도 보잘것없습니다. 이런 질그릇이 보배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질그릇 같은 정황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한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 박해를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이런 일을 당해도 괜찮다, 이런 일은 어쩌다 보니 생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다, 이 자리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라, 우리는 바로 이 자리에 보내졌다, 라는 것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보내집니다. 우리도 동일한 컨텍스트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들이 우리를 이웃으로 받아 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본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구원하는 정도를 넘어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려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목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완성될 때까지 중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를 갖고 우리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우리의 자리

고통은 여전하지만 그렇다고 억울하고 비참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위하여 기도하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보냄을 받은 자리는 탄식하며 걸어야 할 만큼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자리까지, 죽음을 맛보시는 예수의 자리까지, 설마 여기는 하나님이 안 돌아보시겠지, 하고 생각하는 자리까지 보냄을 받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에 얼마나 진심을 다하시는지 지켜보십시오. 탄식하는 자리까지 하나님이 힘을 다하여 당신의 진심을 담아 일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은 자리까지 간다는 것과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 누구보다 더 큰 성의와 의지로 일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그분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의 삶을 명예롭고 진지하게 붙잡으시며 그 영광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대강 살 수 없는 길입니다. 이 길은 명예로운 길이며 영광스러운 지위입니다. 누리며 기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책임 있게 살며 우리에게 누리라고 주신 지위와 그 영광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