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1)
삯이 아닌 은혜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소원이나 진심보다 우선합니다. ‘계시가 인식보다 앞선다’는 말이 이 문제를 잘 설명해 주죠. 하나님이 인간보다 당연히 우선하십니다. 순서상 우선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주인이시고 가치와 운명을 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로마서에 등장하는 ‘믿음’은 율법과 대조되며 또한 행위와 대조되는 것으로 쓰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조건을 만들고 우리가 근거를 만들어야 하는 것과 대조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조건을 만들고 하나님이 근거가 되신다는 점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곧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죄를 용서받거나 일한 것이 없어도 무엇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잘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을 잘못했는데도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미 백 살이 넘었으므로 이삭을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얻은 이삭을 잡으라고 명하심으로, 아브라함과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핵심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삭을 잡아라,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이 되는 일은 네가 낳은 자식들이 원인이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네 자손은 내가 만든다, 너는 자녀를 낳을 수 없었다, 네가 백 살일 때 내가 이삭을 주었다, 네게 이삭을 준 이유는 이삭이 없으면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네가 백 살이어도 자녀를 줄 수 있는 하나님이다, 네가 낳을 수 없을 때에도 줄 수 있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삭을 준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 이삭을 잡아라, 네가 자녀를 낳을 수 없어도 네 후손은 하늘의 별 같이 될 것이다,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믿음이 근거가 아니다, 네가 자식을 만들 수 없음을 확인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내가 하나님으로 일하는 줄 네가 알게 되리라, 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 같으리라고 하셨고, 이삭을 낳자 그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다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무슨 대책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오셔서 매번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네 이름은 열국의 아비다. 내가 네게 하늘의 별 같은 후손을 주겠다”.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이게 말이 됩니까?” 라고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앞이 막막한데 하나님은 자꾸 그에게 와서 이러시는 것입니다. 백 살에 아이를 하나 주시더니, 이번에는 그 아이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아브라함도 압니다. 그러나 이 아이를 잡으라고 하시니 그는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사라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무엇을 받습니까? 웃음을 받습니다. 이것이 로마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구원을 베풀었나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가 언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 하나님과 어긋나 있을 때였습니다. 시간 순서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의 의미
원래 사랑이란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 이유와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에게 이유와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자가 이유와 원인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를 때, 여러분이 그를 거역하여 반대편으로 갔을 때, 그분이 여러분과 화해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꺼내시고 그를 외면한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예수가 오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이미 일어나서 완료된 후에 등장한 ‘그러므로’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에 나온 위대한 반전으로 비롯된 ‘그러므로’입니다. 모두의 입을 막고 모두를 심판 가운데에 가둔 채, 아무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운명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된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며 국면이 전환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그것입니다. 역사와 인류와 인생과 운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먼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일하시고 우리에게 그 열매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해야만 비로소 반응하시는 소극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자주 놓칩니다.
번복될 수 없는 신자의 운명
지금은 ‘예수 이후’의 시대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역사가 예수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예수는 이미 오셨고 이미 죽으셨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서 뒤집힐 수 없고 번복될 수 없으며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엇을 할 때입니까? 누려야 할 때입니다. 단지 무엇을 해야만 하는 책임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누려야 합니다. 누리라고 주신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증명되었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남김없이 쏟아 부어졌는데, 도대체 무엇이 겁이 납니까, 무슨 환난이 겁이 납니까, 무슨 고통이 겁이 납니까, 라고 묻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완료되고 결정된 우리의 운명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고야 만다,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 있다, 현재에 대한 안심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비로소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안심과 확신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를 이미 죽이고 살리신 과거로 말미암아, 완료된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확신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를 건넜음에도 못나게 굽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애굽에 살았을 때에는 이런 것 저런 것 다 먹지 않았느냐, 이 광야에는 먹을 것이 없다, 다시 돌아가자, 라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갑니까?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는 우리는 가봤자 질 것이다, 우리는 못 싸운다, 하면서 밤새 울고 통곡하고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갑니까?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돌려보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십 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밤낮 조마조마하며 자신의 실력만큼만 하나님이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보다 더하십니다. 당연히 더하십니다.
바울의 증언
그는 붙잡힌 바 되고 세워지고 보냄을 받습니다. 전부 수동형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데 왜 우리가 제한합니까. 우리야 못났고 또 못났습니다. 늘 못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못났어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나타났습니까? 십자가로 보이신 증거입니다.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와서 죽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로마서는 이 하나님, 전능하시지만 선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광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과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이것을 지금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과 처한 형편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이 흑암 같은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잘나고 더 굉장해서 빛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세상의 거짓된 영광들을 정면으로 관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우리를 실패했다고, 틀렸다고, 고생한다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명예
우리의 영광과 명예가 어디에서 드러나겠습니까? 세상이 거짓말하는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전부다,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상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 너희는 져 놓고도 왜 웃느냐?”라고 물으면 “너희는 잘 모를거야”라고 답하십시오. 말로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신자의 명예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을 가는 데에 우리의 명예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뛰어들었듯이 답이 없는 세상 속을 늠름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맹인에게 어떻게 색깔을 설명하겠습니까. 믿어야 알게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무슨 설명을 한다 해도 세상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은혜가 찾아오기까지, 눈이 열리기까지, 영혼이 살아나기까지 아무 말도 안 통합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가 누구인지, 예수의 죽으심이 무엇인지 세상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기다릴 뿐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올 테니 늠름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광과 욕됨이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오해를 받으며, 속이는 자 같지만 진실로 참된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유명한 자이지만 무명한 자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자녀인데 사는 형편을 보면 죽은 자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늘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저렇게 살면 망해”라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지고 양보하고 보복하지 않고 세상이 하는 식으로 싸우지 않고 빼앗아서 채우지 않는 것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우리의 명예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겁내지 마십시오. 이것이 평화와 영광으로 가는 길이라는 확신이 여러분의 삶을 붙들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위대해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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