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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14.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_순종, 답 없는 길을 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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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5:12-21)





대표 원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행위와 결정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 것같이, 둘째 아담 곧 하나님이 인류의 대표자로 세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의 범죄로 인류에게 미친 비극과 멸망이 종식되고 그의 부활로 새로운 인류가 시작된다는 원리입니다.
대표 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대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어 생긴 범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사망을 뒤집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 속에서 인생을 살고, 배척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당해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죽음이라는 비극을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아담에게서 일어난 일이 큰 것같이 죽음에까지 따라 내려와 우리를 역전시킨 하나님의 결정과 능력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결과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게 하려고 시간을 역순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결과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 예수 안에서의 승리는 이미 과거요 완료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 우리 때문에 죽으신 예수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을 알고 믿게 됩니다. 내가 이해해서 복음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약속이 있음을 보여주셔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아담의 범죄로 망가진 창조를 하나님이 회복하십니다. 인류를 전부 쓸어버린 후에 새로 만들지 않으시고 망가진 세상에 하나님이 뛰어들어 오셔서 상황을 역전시킵니다. 아담이 행한 죄가 모든 후손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이를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어 죽음을 뒤집으신 것은 얼마나 더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 전에 있던 모든 것을 바로잡기에 충분하지 않겠느냐, 하고 로마서가 복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추상명사가 아닌 인격



성경은 구원을 하나의 법칙으로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법칙을 쓰시지 않고 실제로 역사 속에 직접 쫓아 들어오셨습니다. 인격이 가지는 피와 눈물과 땀과 한숨과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자꾸 놓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가, 하나님이 얼마나 빈틈없이 신실하신가를 보여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은 구체적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설득하시거나 규칙을 제시하시거나 명분으로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직접 손을 내밀어 인류를 새로운 길로 끌고 가십니다. 아담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묶인 모두를 죽음 속에 묻고, 모든 절망을 무덤에 묻고, 다시 밖으로 꺼내셔서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당신이 앞장서서 모두를 끌어안으십니다.

“하나님을 안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서 발버둥 치며 빠져나가려는 나를 하나님이 놓아두지 않으셔서 내가 구원을 얻게 됐다”(C.S 루이스)

하나님이 타협하시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아서 우리가 여기 온 것입니다.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받는 우리 곧 인격과 인격에 작용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십니까? 그는 창조주이십니다. 창조를 망가뜨린 인간의 결정을 엎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십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가 저지른 모든 결과를 다 뒤집어쓰고 우리를 껴안다가 당신 자신이 피투성이가 된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을 감수하고 쫓아 들어와 역전시키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은 오랜 고통입니다. 이기심을 가지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스스로 결과를 이루시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눈물과 미련과 반항과 고집과 도망, 그 모든 것을 담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먼저 십자가부터 박고 세우셔서 울타리를 치신 후에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 놓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신자의 무한한 복입니다.



감수하며 사는 새로운 인생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상 속에 있다고 합니다. 어떤 세상입니까? 회복의 세상, 구원의 세상, 사랑의 세상입니다. 이전 것은 무엇입니까? 아담 안에 있던 세상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 아담 안에 있던 세상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믿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의 운명을 십자가로 세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정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믿었다, 안 믿었다로 너무 쉽게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릴 뿐입니다. 믿는 것은 복이며 영광입니다. 안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자는 안 믿는 자와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십자가를 세우신 하나님을 아는 실력을 갖는 것으로 달라야 합니다. 삶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를 회복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회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회복된 자로서의 온유와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타인을 감수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덕목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신령한 무기와 실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는 영광의 모습으로, 때로는 욕됨의 모습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할 뿐 아니라 우리도 우리 자신이 그렇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길을 가게 하셨는데 이게 뭔가, 싶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이 다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삶

하나님이 앞서서 일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인생을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명분이나 덕목을 실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순종은 어떤 이상을 구현하는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고,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쁘신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데에 우리의 생각과 소원을 두고, 자신을 맡기는 것이 순종입니다. 지금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감수하는 것, 이것이 순종입니다.
고단하고 이해가 안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도하는 인생이 백 번 더 낫다고 믿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더러 가시밭길을 걸으라고 하시면 그 길도 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우리가 처한 현실, 이 아무것도 아닌 길, 앞이 캄캄하고 답이 없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압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죽는 것이 사실이듯 그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압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고 있다는 것, 이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죽어도 좋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어도 유익하다, 하나님이 나의 죽음으로도 무엇을 하신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무엇인들 감수하지 못하겠습니까.

담담하게 살아가십시오. 자기 자리에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영광과 욕됨으로 그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고 합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벌써 죽으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한 명 한 명에게서 그분의 모든 것을 부어 일하십니다.

기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를 확인하려 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나를 확인하게 하사 예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늠름하게 우리 인생을 살게 하시고 영광된 인생을 누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