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4:23-5:4)
하나님이 하신 일
율법이란 우리가 조건을 내놓아야 하고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합리적 수단을 동원하는 방식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율법과 행위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설명하는 병행 단어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24절의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에서처럼 강조는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말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예수는 이미 오셨다고 강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는 각자 어느 특정한 시점에 태어나 나름의 인생을 살다가 언젠가부터 예수를 믿게 되어 그 믿음을 고백하고 결단하여 신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면 그때야 예수가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수는 이천 년 전에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간상의 역순(逆順)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취소될 수 없는 구원
“다른 것은 다 모르겠고 예전에 안 보이던 것이 이제는 보여요”.
이것이 구원에 관한 중요한 이해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는 순서인데, 하나님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새 시대다, 은혜의 시대다, 이렇게 성경이 선언합니다. 그러니 각자가 믿는 것은 이차적 문제입니다. 일단 믿고 나서 보니까 이 일은 그때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이미 오셨는데 왜 우리를 죄인으로 태어나게 한 후 새삼스럽게 믿어서 알게 하는가, 하고 묻게 되지요. 로마서 4장의 답은 이것입니다. 취소될 수 없게 하려고 그랬다, 결과부터 정해놓고 나서 태어나면 믿고 선택하라고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태어나지만 우리의 운명과 결과가 이미 과거에 완료되었기 때문에 도망갈 데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이 아이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확인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더러 ‘이 이삭은 내가 만든 자식이 아닙니다’라고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만들 수 없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자기가 얻은 결과를 스스로 만들어 낼 아무 조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그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오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맥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맥락은 우리에게도 연속성을 가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징벌과 심판을 받아야 할 모든 인류를 이 죽음 안에 싸안고 없애 버리신 셈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아래 모든 인류가 함께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예수로부터 새 인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결과와 운명과 최종 승리를 여기다 못 박아 놓고서 우리에게 시작과 과정을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모를 방법입니다. 대단한 역설입니다. 어떻게 끝이 시작 전에 올 수 있습니까? 이는 역설입니다.
우리의 운명과 존재와 그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결정하신 후 각각에게 자기 삶을 허락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상 우리는 뒤늦게 태어나고 우리가 죽어 하나님을 만나 뵈올 때까지 각자의 선택과 여러 시험과 주어진 기회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곧 십자가에서 결과를, 모든 인류의 운명을 이미 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자랑스럽지 않은 때에, 야곱이 기대하지 않고 구하지도 않은 때에 등장하여 복을 주시며 그 이유를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아브라함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시작하신 것을 이제 온 인류에게 허락하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고 하십니다. 야곱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를 허락하십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했던 것처럼, 예수 이후에, 예수 안에서 이 약속이 성취되어 오늘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로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
‘그러나 이제는 화평을 누리자’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입니다. 언제부터 현재입니까? 예수님이 못 박히신 자리에서부터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맞을 것 맞고 받을 복 받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와 우리의 완성을 방해할 수 없으니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이런 운명을 가진 사람답게 주어진 현실을 살라고 합니다.
이미 결정된 우리의 운명과 승리와 영광을 예수 안에서 펼치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펼치십시오. 그것은 책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우리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이 길을 살아 보라는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은 취소될 수 없는 역사적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를 언제 믿었는지는 다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가 예수를 믿고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당신의 지혜와 충만을 시간과 역사와 우리의 삶에서 구체화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멋있게 사십시오. 사람이 멋있다는 것은 어려울 때 드러납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라는 성경의 말씀은 세상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만 할 수 있습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대응하고 힘으로 힘을 대응하면 누군가가 죽어야 일이 마무리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역전시킨 인생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창조의 능력과 모든 것을 반전시키는 부활의 능력이 시간 속에서도 나타나서 시간의 역순으로 일하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후회와 우리의 실패는 씻을 수 없고 만회할 수 없는 과거지만 그것이 무엇을 만드는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깊은 생각은 자랑이나 성과가 아니라 인격과 성품으로 드러납니다. 그런 인격과 성품으로 막막한 현실과 무시무시한 인생의 위협 앞에 구체적으로 답해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진 풍상을 겪어 내면서 자리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외면당할 수 있고 억울할 수 있지만, 이 일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그늘과 보호를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서 있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실력입니다. 이런 실력은 많이 배우고 많이 가져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이것을 이루시며 그렇게 일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으로 시작한 말씀이 드러내는 새로운 현실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겪으신 고난은 그것 자체가 영광으로 가는 길이었다, 영광은 고난 속에서 빛난다, 그것 없이 빛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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