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롬 4:1-12)
율법과 은혜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은 하나님의 의지와 지혜에 의한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은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죄밖에 짓지 못합니다. 여기서 죄란 다만 도덕성에 저촉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거부와 외면이 죄의 핵심 되는 내용이라고 바울은 지적합니다. 곧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不敬)이 죄입니다.
율법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불경한 인류 전체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3장 21절에서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로 국면이 크게 전환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운명과 처지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어 ‘율법 외의 하나님의 한 의로 말미암는 예수 안에서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는 은혜에 속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세우심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심판으로 몰고 간 것은 율법의 잘못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생긴 일입니다. 율법이 덩달아 욕을 먹은 것이죠.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은혜는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완성하시며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율법과 은혜는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와 불경을 행하는 자들에게 임한 것이 결국에는 은혜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면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운명에 하나님이 징계와 진노와 심판을 보이셔서 인류에게 잘못 가고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가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이고, 이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일이 구원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파멸에 이르는 운명을 살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그들의 곤경을 해결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고 나면 율법의 가치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배경
로마서 앞부분에서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의를 행하는 자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입을 막고 모두를 심판 아래 가두었다는 선언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심판 아래 가두어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에 여러분이 스스로 항복하시는 날이 빨리 와야 합니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 시간에 쫓겨 사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돈 있고 힘 있으면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들도 망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 대책 없고 희망 없는 인류의 현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복 받음의 대표인 아브라함
로마서 3장 21절에서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하여 이전과 이후를 예수로 나누듯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 앞과 뒤를 나누는 것입니다.
인류의 이 현실이야말로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국면 전환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현실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 일들은 우리에게 이런 시각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이 모든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이 일의 시작과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그런 하나님께 붙잡힌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끝났다, 우리는 대책이 없다, 자기 스스로 ‘믿으면’의 자리로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다, 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세우셔서 “내가 인류를 축복하고 내 능력과 신실함과 은혜로 말미암아 내 백성으로 기어코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인류에게 복을 실행하시고 구현하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대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내셨음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을 아브라함이 가지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과이지, 조건으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이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셔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그에게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미 변화된 세상
내가 믿어서 예수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기 전에 예수께서 이미 죽으셨습니다. 이미 구원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구원을 이루신 일이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와 무엇을 하려고 이제야 온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의 운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미 준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이미 일어난 과거, 번복할 수 없는 과거, 지금 내가 내리는 결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과거에 이미 역사하신 분으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분 각자에게 오셔서 세세하게 일하시기 전에 이미 먼저 역사와 세상과 인류를 대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을 각각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십니다.
세상이라는 판이 예수로 말미암아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구원이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성취와 실체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으로 판이 바뀐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부활 세상을 삽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새로운 현실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로 이미 천국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천 년 전에 나를 포함한 인류를 당신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각자에게 적용하는 일이 오늘 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전에는 멸망의 판, 절망의 판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은혜의 판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힘들지만, 우리는 저들과 동일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힘든 현실을 저들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더 힘듭니다. ‘우리가 더 힘들다’고 표현하는 것은 저들은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명예입니다.
거친 막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만큼 손해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명예이며 영광을 누리는 일입니다. 말을 아끼고, 원하는 대로 보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자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도 되는 본질적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소망이 없습니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도요, 신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름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것과 똑같이 예수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런 약속으로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약속하고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와서 그렇게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합의해야 이 일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 혼자서 이 목적과 내용을 지켜내기로 약속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그의 후손들이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을 그들의 조건과 자격에 의하여 결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당신의 신실하심과 복 주심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로 하여 세워진 대표가 아브라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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