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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07 욥_ 전통보다 크신 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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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 (욥 10:1-22)

보완이 필요한 전통

욥이 그러한 도덕률과 규칙과 전통과 지혜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지금까지 그러한 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는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중입니다.
지금 욥은 그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여 그 틀을 만드신 이를 더듬어 찾고 그 주인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는 예외와 특별함이 전통의 틀을 깨는 것이 아니라 보완해야 한다는 필요에 대한 도전일 수 있지 않느냐? 우리가 더 깊은 답을 찾아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란 허무주의를 깨기 위하여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고유한 권리란 선택권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우의 선택권은 자기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선택을 ‘내가’ 한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자연주의 속에서는 옳고 그른 문제가 없으니까, 자연주의의 허망함을 깨기 위하여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는 선택권, 거부권만 있는 실존주의가 나왔습니다.

법칙이 궁극적 권위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문제를 풀어 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도덕, 전통과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의 규칙이고 법이고 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좇아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복은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기독교인에게 자연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이며 은혜를 베푸시는 현장입니다. 냉정한 법칙에 얽매인 기계적인 반복이나 순환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이며 기회이자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도덕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도덕성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지, 도덕이 전부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법은 하나님의 한 성품이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당신의 한 속성을 드러내는 계시이지 그것이 유일한 틀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궁극이십니다.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욥

욥기에서는 욥이 믿음의 화신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틀을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려는 분노입니다.
욥은 계속 그 틀 위에 계신 인격자를 만나고자 합니다.
욥기 10장은 전부 하나님에게 만나 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궁극적 권위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틀로 사람을 묶을 수 없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알아 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나 번복이나 포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욥이 이런 고백을 하는 자리까지 옵니다. ‘하나님,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제가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실 수 없음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기가 알고 있고 친구들의 충고 속에서 그동안 지켜 왔던 틀로 담을 수 없는 인간의 고귀함을 보게 됩니다. 이제껏 자신이 가졌던 틀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을 통해, 그 틀을 뚫고 나와 하나님 앞에 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을 주셔서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셔서 그 생명을 무성하고 영광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그런 영광된 존재로 부름받은 것이 맞습니다.’ 이제 욥은 도덕률과 전통과 다른 어떤 관념으로도 묶일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어떤 깊고 큰 것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내가 물어봐야겠다.’ 욥은 이런 경지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해결책이 없는 절망, 설명할 수 없고 답할 수 없는 절망 때문에 욥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됩니다. ‘인간은 망하도록 창조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조되었을 리 없고,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다면 하나님에게 해결책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다른 답이 있을 것입니다.’
욥이 믿음의 화신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법칙 아래 묶이지 않고 하나님을 계속 찾아 나갔습니다. 하나님에게만 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본인이 적극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궁지에 몰려 하나님 외에는 답을 줄 수가 없다는 부정적인 절망 때문에 나온 아우성에서 시작했지만 서서히 긍정적인 자리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욥을 인내의 화신이며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밀고 당기시는 하나님

기독교에서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학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가를 학문적으로 가르치며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말을 하면 그 말을 이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설교란 무엇일까요? 설교의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내자면,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와 동일한 조건 속에 있는 사람을 세워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청중과 동등한 조건이 더 많이 요구됩니다.
설교자가 성도의 사정을 모르고 이야기하는 자가 아니라 성도와 동일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그 형편을 충분히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청중과 마찬가지로 전전긍긍하며 사는 자가 힘을 다하여 하나님 편을 들어서 듣는 자들을 수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시는 분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실천신학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허공에 떠 있는 환상과 관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 개개인의 인격 속에서 확인되고 항복되고 구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면을 보강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만 법칙과 힘의 존재가 아니다. 나는 이해하고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는 기적과 축복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이 내용을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하게 하고 고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만 법칙 속에 안주하고 기계적 이해 속에 보장받는 수준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서 ‘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필요한 존재여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도록 밀고 당기고 끌어안고 씨름하십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진심으로 항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신앙

성경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규범적이고 표준적인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각 개인이 그 규범과 표준을 자기 인격과 인생 속에 담아내고, 마시고 채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구체화해야 하는 텍스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설명이 성경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를 믿는 각 성도들이 각자의 삶에 놓인 시험과 유혹과 도전과 한계와 고통과 고민과 절망 속에 울고 발버둥 치면서 결국 모든 안전과 타협을 거부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또 하나의 텍스트를 만들어 냅니다.
신앙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인격과 생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 속에서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구체화를 하려면 반드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우리가 육체에다 버릇을, 내용을 만들어야 합니다. 피와 살을 바꿔야 합니다. 뽑고 새로 넣고, 뽑고 새로 넣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울고불고 실패하고 포기하고 타협하고 돌아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안 놔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 친구가 아니라 욥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로 부름을 받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막 2:27)니라. 법보다 인간이 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법 아래 가두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에도 가두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과 모든 관념, 명분, 이상을 뛰어넘어 실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속에 발버둥과 한숨과 조마조마함과 자책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할래? 세상과 안전 속으로 도망갈래 아니면 나하고 끝장을 볼래?” 하는 도전 앞에 우리를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기쁨은 ‘나는 다른 존재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보상과 보장이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덜 중요하거나 하나님이 쉬고 계셔서가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증거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고 흔드시고 깨우시는 줄 알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과 명예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믿음의 항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