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05 욥_고통이 존귀한 인간에게 왔도다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본문


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 7: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내게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 6:1-7:21)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욥의 하소연

지금 욥이 하는 하소연은 감당할 수 없는 고난, 고통, 이해할 수 없는 환난에 관한 것들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당하는 고통은 아니라고 끝까지 자신 있게 주장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체계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욥기는 시작부터 욥을 무흠한 자, 애초에 완벽한 자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이 무엇인가, 왜 생겼는가,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친구들은 자꾸만 잘못짚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계속해서 욥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그렇다고 이 부분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 질서의 견고함이라는 것은 신앙의 첫 번째 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욥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당장 이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그런다’ 하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나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이 일은 너희가 나한테 하는 이야기와 내가 예전에 행했던 도덕 질서와 신앙의 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않느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않았느냐?’
법이 무엇입니까? 법은 외적 강제력입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외적 강제력이 법입니다. 도덕은 무엇입니까? 도덕은 내적 강제력입니다. 인간이 지니는 가치와 명예에 대한 내적 동기입니다. 도덕은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낮추겠다고 결심하지 않는 한 동력을 받을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 도덕입니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내 속에 동력이 없다. 지금 일어난 일은 내가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내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죽겠다는 것을 너희는 탓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

이런 것이 예수 믿으면서 보는 가슴 아픈 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저 사람은 안 믿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불쌍합니다. 불쌍하지만 가서 욕할 필요 없고 정죄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자랑할 방법이 없으니까 부정적으로 확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자를 향해 욕해서 확인하고,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을 꾸짖어서 자신을 확인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사납게 굴고, 왜 이렇게 못살게 굴까요? 욥의 친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닙니다. 욥이 당하는 억울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라면 욥의 이 말에 자신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무엇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내 신앙의 동력, 내 안의 공감이 무엇이며 자랑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고통이 왜 왔는지, 무엇 때문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는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너희보다는 내가 많이 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야 하는 싸움


도덕 질서라는 분명한 첫 번째 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틀을 깨는 데서 멈춰 서면 안 됩니다. 기본 틀을 깨고 좀 더 고급한 틀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솔히 말하고 불평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어서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가 참을 수 있었으면 결단코 첫 번째 틀을 깨고 두 번째 틀로 진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틀이 깨지는 과정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복된 일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가치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만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유능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욥기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면제해 주시려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면제해 주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어느 학자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시작한 구원과 영광된 약속 사이에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 현실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개입을 이야기해야 할 만큼 신앙 현실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죽이지 않으십니다. 욥이 살아서 두 배의 복을 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이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 있다는 아우성

인간에게 존귀와 영광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그렇게는 못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욥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정도로 만들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이 내용이 우리의 것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런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까’ 하는 공감과 항복을 받아 내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동참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아는 상상과 소원의 최고봉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큽니다. 우리의 구원은 말이나 법칙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 와서 죽으신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때 이것이 하나님에게 어떤 고통이며 극심한 희생과 헌신이었는가를 놓치면 기독교는 다만 도덕성이 되며 자랑과 성공에 불과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더 큽니다. 이 길을 환희에 차서 웃으며 기쁨으로만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울며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떠는 두려움과 간청으로 얼룩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와 연결되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쉽지 않았던 길인데 어떻게 우리는 쉽게 가야 한다고 욕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도록 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욥의 기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 현실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값싼 것으로 만들지 않기로 하셔서 그렇습니다. 덕분에 우리가 고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명예와 자랑이라는 것에 감격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시작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강림, 그것이 모든 신자의 생애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울부짖음과 눈물, 한탄과 공포와 절망, 그리고 반전된 승리와 기적과 놀라운 탄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무게와 영광을 알고 성경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소원대로 놓아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크신 뜻과 광대하심과 지극하심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통의 경한 것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줄 알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애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대로 지켜 내는 힘을 주옵소서.
많은 눈물과 기도로 인내와 기다림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항복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