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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06 빌닷_전통에 승복하고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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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8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20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욥 8:1-22)

하나님의 임재

전통에 근거
욥기는 그 지점을 넘어서고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의 상황은 인과응보라는 견고한 도덕, 도덕률, 도덕 체계로도 답이 되지 않고, 전통, 경험, 지혜라는 것으로도 답이 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재

한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전통이 어떤 시점에서 소위 고정 관념이 되는지가 문제입니다.
시편 88편, 이때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간섭하시고 축복 속에 붙잡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88편의 셀라-‘하나님, 주의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정답을 맞춘 자, 바른길로 간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은 그것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시편 1편만 해도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그들이 살아보고 증언한 내용입니다. 처음부터 따라야 할 길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파노라마를 거치고 나서 항복한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사건들

창조란 거대한 불연속입니다.
출애굽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세계가 깨지는 놀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가진 어떤 힘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합니다.
바벨론 유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와서 죽으셨다는 것 아닙니까?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십니다. 창조가 더 큽니까, 부활이 더 큽니까? 우리는 그것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고정관념이 생기고, 하나님은 그것을 깨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정관념을 깨신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깬다는 것은 있었던 것을 부수어서 무효로 만든다는 개념인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고정관념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엘리바스가 증언한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고, 빌닷이 증언한 하나님이 전부가 아닙니다.

신약시대에서 하나님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이 우리 개인의 것이 되게 하는 일을 다시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창조와 출애굽과 바벨론 유수와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각각 경험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이 성경에서 증거하신 역사 속에서 드러난 진면목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친구란 무엇입니까? 법칙과 이해관계를 벗어나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꾸중할 때 사용한 인과응보라는 법칙, 지금 빌닷이 꺼내 들고 나오는 전통이라는 경험, 이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관계가 친구 사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은 법이나 규칙 같은 틀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욥기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법이나 규칙이 큰 틀인 것은 맞지만, 그 틀은 더 고급한 관계를 근거로 해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설명해 주십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역사 속에 두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것이 기도가 뜻하는 바입니다.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품으시는 관계를 요구하신다는 뜻입니다.
법은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의 질서이며 사랑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현실 속에서 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문제들이 전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문제들 속에서 더 깊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고민이 그치지 않는 삶, 괴로운 현실을 사는 것입니다. 잘 살고 있는 욥을 흔드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생각하십시오. 더 깊이 생각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분의 부름을 받고 있는지, 어떤 분에게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어떤 분에게 우리의 운명이 붙들렸는지 깨달아 더욱 무겁고 진지하고 깊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그 내용을 채워가는 열심과 각오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당신의 크심 때문에 우리들에게 큰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내놓는 간단한 대답을 하나님이 뒤엎으십니다.
건강하고, 욕먹지 않고, 자존심 세우고 살면 전부인 것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더 윤리적으로 살고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더 깊은 차원을 요구하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진심을 기억하게 하사 우리의 인생과 운명을 걸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의 순종과 치열함과 각오와 실천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