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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09 욥_ 옳은 것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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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5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15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6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7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18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20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21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22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23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24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25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욥 12:1-25)

천지 사방에 널려 있는 증거

전반적인 분위기로 볼 때 욥은 분노하는 중입니다.
‘너희가 하는 말을 나도 아는데, 그것으로 답이 안되는 길로 내가 붙들려서 가고 있다’ 하는 것이 바로 욥이 가진 분노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욥은 이에 대해 ‘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시는지 알려 달라고 그러는 중이다’라고 반론하는 것입니다.
내가 형통할 때나 잘못이 없을 때에는 “아니, 왜 벌을 받아? 왜 불행해?” 이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재앙이 언제 올지 모르더라는 말입니다. 난 멀쩡한데도 이런 곤란한 자리에 왔는데 평안한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정작 내가 어려움을 당해 보니까 답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꾸중하는 친구들과 반론하는 욥이 서 있는 자리의 차이입니다.

욥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답이 안 오더라는 말입니다. 답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대하는 답을 안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크다는 데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욥기의 가치입니다.
고난과 의심과 막막함 속에도 커다란 내용이 숨겨져 있더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욥기입니다.
‘천지 사방에 널려 있는 증거들을 봐라. 누가 이기는가 봐라. 정직한 자가 이기지 않고 간교한 자가 이기지 않느냐? 자연 세계가 그렇지 않느냐? 자연 세계의 주인이 누구더냐? 정직한 자가 아니라 간교한 자가 아니더냐? 온 세상에 그 증거가 널려 있지 않더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9절에 보듯이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통치와 허락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실제 자연 현상을 보라. 어디 정직하고 순진한 것이 보상을 받더냐? 땅에게 물어보라. 바다에게 물어보라’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천지 사방에 증거들이 깔려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하나님은 옳게 일하면 늘 상을 주고 틀리면 벌을 준다고 간단하게 답을 내려고 하느냐?’ 그러는 것입니다. 욥이 자꾸 그 틀을 허뭅니다.
오래 살면 입바른 소리를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래 살아 봐라. 뭐가 뭔지 모르게 된다. 뭐가 잘된 건지 모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속고 누가 속이는 것인지, 누가 이기는지를 하나님이 정하시지 인간이 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의 관계

예수 믿는 자의 자랑은 늘 옳은 선택을 하고 늘 바른 길을 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유익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것밖에 받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손해 보게 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것이 다만 잘못된 것으로 끝나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유익을 얻게 하신다.’
성경은 우리가 능력, 집중, 순전, 열정 같은 단어들에 묶여 있지 않고 그것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신비와 자비에 묶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직선으로 걸어서 한 줄로 된 땅만이 아니라, 비틀거리면서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주시겠다는 약속과 같이 넓은 땅을 갖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욥은 이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욥의 가장 큰 가치는 절망에서도 계속 하나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말하는 것은 규칙이고 명분인데 반해서, 욥은 하나님에게 묻고 있습니다.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양심이나 옳음이나 앞에서 이야기한 개념과 가치들을 하나님 대신 섬기지 않고, 그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욥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당한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에 욥기의 가치가 있습니다.
욥의 신앙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 관계라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법칙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두 단어, 믿음과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도는 사랑의 대상이며 관계의 대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법칙으로 갑니다. 잘잘못으로 갑니다. 잘잘못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은 그것보다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의가 원칙보다 중요

욥의 가치는, 욥이 자기가 겪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묻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더 큰 이해가 있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아우성이 있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 변화, 신비로의 내몰림에 관한 실존이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바라보면 사탄이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부나 비난을 자신의 성찰과 변화로는 쓰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고소당한 욥에게는 이 문제가 자신의 변화와 자신의 진전으로 작용합니다. 이것이 욥의 가치이며 복입니다.
인생의 고통에는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과 관계 맺은 사람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것이 없습니다. 세 친구들도 그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욥의 분노가 있고 욥의 분노로 표현되는 성경의 분노가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해관계와 잘잘못을 떠나서 친구라는 관계가 가장 우선되는 조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른이 되면 모두를 끌어안기 위해 애매하게 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애매하다는 말은 세속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붙들고 있는 것이 어른의 책임입니다. 붙들고 있는 것, 내가 있는 동안 갈라져 나가지 않게 붙잡는 것입니다. 내 주장은 없습니다. 옳은 것보다 깨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과 갈등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과정, 또 거기에 놓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과정을 거부한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집니다. 키워야 할 존재, 채워야 할 존재, 변화되어야 할 존재, 나아져야 할 실체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깨고,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게 굴복시키려 하고, 나 편하려고 강요하는 것이 우선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직도 모르는 것입니다.
한 인격과 인격 사이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욥기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세 친구 역을 하지 말고 욥의 역할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변화를 받아야


하나님이 두려운 이유는 그분이 잘잘못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지 마시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다, 이렇게 우겨야 합니다. ‘우기다’라는 말은 세속적인 표현이지만,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은 잘잘못에 관한 것도, 유능함의 문제도, 명석한 이해도 아닙니다. 떼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다. 네 까짓 게 뭐냐? 덤빌 테면 덤벼라. 나 하나님의 딸이다”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과 의심과 불안과 막막함의 주인이시라면,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겁날 것이 없습니다.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하나님에게 매달립니다. 인격적 관계가 최우선이며 모든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들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일 힘듭니다. 하나님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가 믿을 만하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주장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방법, 환경, 조건, 경험, 주인 없는 좋은 말들, 진심, 열심, 회개, 구원, 복음, 사랑 그런 것들이 인격 없이 그것 자체로 난무하면 무차별적인 강요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정죄가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내 이해보다 크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알고 있는 틀을 깨고 오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도전에 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애와 현실에서 경험한 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확인한 자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언하는 자로 사용되는 자리입니다. 아브라함과 욥이 서 있는 그 자리에 우리가 나란히 서서 그 증언을 우리의 것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그 신앙을, 그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