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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03 욥_어떡하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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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 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 3:1-26)

보응의 원리


신자가 자기의 존재와 현실에 대해 자책하는 것은 하나님한테 차마 직접 이야기할 수 없는 불만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그날이 왜 달력에 있었더란 말이냐?”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 어떡하란 말입니까?”의 다른 표현입니다.
1, 2장의 사건이 3장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이 그 울타리를 벗기자 욥이 그 울타리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잘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보응의 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헐어 버린 그 울타리를 욥은 계속 붙들고 늘어집니다.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그런 보응의 원리 외에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하니까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 1장과 2장의 결론입니다.
부인은 보응의 원리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해의 범주, 사고의 틀이 깨진 것입니다. 그러자 그것이 깨지고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 틀이 깨진 것입니다. 그 틀은 인간이 붙잡아서는 유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틀은 하나님이 유지하고 계셔야 유용한 것인데, 하나님이 그 틀을 깨 버리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식 만들기

예수께서 어떤 길을 걸으셨습니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길, 곧 고난과 수치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기억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욥이 당한 일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 길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목적과 내용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 길을 간 선조들이 이렇게 많으니, 너희도 예수께서 그 길을 간 것을 기억하여 너희가 당하는 어려움에 맞서 승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욥기에서 보는 모든 고난들을 포함한 것보다 더 큰 내용을 우리에게 감수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징계’라는 말의 원어 뜻은 ‘자식 만들기’라고 합니다. 고된 훈련입니다.

신앙의 사춘기

인간이란 책임을 져야 하며 분별력을 지녀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순진한 것이 좋은 신앙이고 정성을 부으면 모든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깨지는 시기입니다.
최고의 신앙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셔서 십자가의 승리를 만들어 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는 진정한 신앙의 완성의 길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장에 이르러 욥이 이 시점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 어떡하란 말입니까? 내가 무얼 잘못했단 말입니까?” 그의 순진함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그 믿음의 법칙이 깨지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당황은 본인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밑에 들어가지 마라. 바울 밑에 들어가서 네 정체성을 확인하지 마라. 바울은, 너를 위해서 소모품으로 세운 것이다. 네가 더 크다.’ 이 이야기입니다. ‘바울도 너를 위해 세웠고, 아볼로도 너를 위해 세웠고, 게바도 너를 위해 세웠고, 세상도 너를 위해 지었고, 생명도 너를 위해 주었고, 사망도 너를 위해 주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사람 밑에 들어가지 마라. 세계 밑에 들어가지 마라. 어떤 자그마한 가치 밑에 들어가지 마라. 너희가 가장 큰 존재다. 창조된 것과 창조 세계의 어떤 가치와 성취라도 너희가 그 밑으로 들어갈 만한 것은 없다. 너희가 가장 크고, 그것들은 다 너희에게 주어진 것이다. 너희는 다만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너희는 왜 너희의 인생과 가치를 이렇게 간단하고 쉽고 작게 만들어 놓느냐?”
“너는 그것보다 크다. 그런 것에는 네 새끼손톱이나 걸어라. 너는 왜 네 목숨과 운명을 그런 작은 것에다 걸고 있느냐? 너는 나를 무엇으로 알기에 그 작은 것에 네 목숨을 걸고 있느냐?” 그렇게 꾸짖는 장면입니다.

깊고 넓은 자리

구원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아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아무도 이해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예수와 복음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내가 어디 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늘 떤다. 이것은 그려 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복음을 설명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입니다. 보응의 원리를 훨씬 넘어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하면 복 주고 우리가 못하면 벌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 만물이, 우리가 누리고 혹은 소원하는 모든 가치가, 이유 없이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성실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기쁘심으로 허락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없는 것에서 만드시는 그리고 죽은 것도 살려 놓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서 부름을 받고 자식 하나 낳을 수 없을 때 이미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실제로 그렇게 된 자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욥이 지르는 비명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이해와 논리 속에서 하나님을 제한하고 자신의 가치도 제한하여 그 법칙 안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집어넣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큽니다. 그것보다 큰데 왜 불만일까요? 고통스러우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의 실존을 만드십시오. 예수 믿는 한 인격과 영혼의 위대함과 깊이를 만들어 내십시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욥은 그리로 갈 것입니다.

욥기의 시작에서 욥이 무엇에 탁 걸려 넘어졌다고 했습니까? 사춘기적 신앙, 순수하고 단순하고 확실하고 가난한 신앙에 탁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어떻게 욥을 채우시는가, 그리고 욥의 친구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시비를 걸고 해답을 제시하는가를 우리가 낱낱이 살펴서 이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이 산을 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라는 깊고 높고 넓은 자리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