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14-23)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려는 이유
로마서는 큰 시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리기 위해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인류 전체를 관객으로 놓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 실제 역사 속에서 그 약속이 어떻게 추진되고 실현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하심이 바울을 로마의 교인들에게까지 보내고 있으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는 갚아야 할 빚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부끄럽지 않다’는 표현은 소극적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매우 자랑스럽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9절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에도 같은 방식의 표현이 나옵니다.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은 실패가 없고 모자랄 것이 없다, 물 샐 틈이 없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포위되었다, 너희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모든 특별한 경우, 모든 절망, 모든 불가능에 이 복음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놀라운 약속은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이미 저지른 일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저지르기 전에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지른 다음에도 뒤집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담긴 뜻입니다.
신실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17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보자면 이렇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신실하시므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신실하게 된다. 기록된 것처럼 의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게 사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벗어나면 그 자체가 심판이고 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미 행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순간은 모두 하나님의 행위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의로우심과 능력이 펼쳐진 역사적 사건 위에서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그것을 지키셨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 회개, 결단, 신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처지를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죄 지은 대로 갚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거기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통치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셨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여기에 참여하고 누리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나 하나님의 일하심이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은 여기서 조건이 아닙니다. 훨씬 큰 선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누구나’라는 의미입니다. ‘너도 된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무엇일까요? ‘나도 되는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죄를 짓던 데서 죄를 안 짓는 데로 돌아서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도덕성과 종교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관계의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회개할 때 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제 압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를 입어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또한 압니다. 나도 하나님께 신실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은 조건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각오와 감동 속에 동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동력이 있습니다.
신실하지 않은 자들에 관한 문제
인간에게는 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 때문입니다. 죽어나가니까 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났어도 죽어버리는 데는 대책이 없거든요.
인간의 영혼은 스스로는 답할 수 없는 깊은 문제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 자체가 인간이 더 큰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인류가 행하고 또 행할 수밖에 없는 그 거역의 현실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패, 무지, 패역함을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극복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로 말미암아 당신과 인류가 화해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을 초월하여 떠다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분기점을 만들어 낸 분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일어난 역사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역사에 못을 박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화해했다, 나는 너희에게 신실한 하나님이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와라, 예수는 너희를 위하여 피 흘려 죽었다, 그 누구도 이 부름에서 제외될 수 없도록 예수가 조건을 만족시켰다, 내가 너희를 부른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영역과 존재와 가치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선언한 신앙생활
복음이 선언한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시작하신 예수 안에서의 신실한 약속에 근거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생애를 그분의 통치에 동참시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셨고 예수 안에서 보이신 대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일하고 계신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가치다, 우리는 큰 그림의 한 조각이며 한 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큰 그림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고, 진행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못나서 이 일에 들어갔다, 나갔다 할 따름이죠. 하나님은 신실하게 일하고 계신데 말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신실한 자가 되도록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예수 안에서 불러 내 백성을 삼았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살아라, 너희가 못났다고 해서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힘으로 유지되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서 내가 한 약속이다, 그러니 담지 못할 것이 없다, 라고 역사적으로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자비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아래에 있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그 통치와 보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유
진리가 자유를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입니까? 옳은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진리입니다.
인격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인격에는 융통성이 있습니다. 타협하고 망가지는, 혼란과 부패를 일으키는 무원칙이 아니라, 원칙보다 더 큰 것을 만들어 내는 자비와 은혜를 뜻합니다.
불쌍히 여기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는 이 모든 것은 원칙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이 가지는 의지요 성품입니다.
자유는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신실한 통치 아래 들어가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의 부요함을 알게 됩니다.
크고 넉넉하고 무한하고 풍요로운 인격과 성품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해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 중의 하나가 바로 ‘두려움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예와 위대함을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한테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깨닫게 하시며 살찌우시고 알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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