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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의 종교, 중력의 중심, 우리의 진리다"
-프란츠 마르크-
20세기 초 작가 헨리 애덤스
그의 마음은 "기계론적 우주론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계에 마음을 빼앗기다
기독교 대안으로 제시하는 모든 세계관이 그렇듯, 기계론적 세계관도 그 본질을 들여다 보면 대체종교, 곧 마음의 우상이었다.
애덤스가 세계관의 변화에 유독 민감했던 것은 낭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세계관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반대 흐름으로 남아 있다.
계몽주의, 곧 분석적 전통을 계승한 세계관들의 계보는 나름의 방식으로 실재를 쳐내어 상자 속에 집어넣으려 했던 세계관들을 양산했다.
그중 영향력 있는 것만 꼽아도 경험주의(감각의 상자), 합리주의(이성의 상자), 자연주의(자연의 상자), 유물론(물질의 상자)이 있었다. 이제는 낭만주의 곧 대륙 전통을 계승한 세계관 계보를 살펴볼 것이다. 이 계보에 속한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칸트의 위층인 '자유'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이 전통에서도 나름의 환원주의적 상자가 생겨났기에, 우리는 어떤 상자들이 있는지 알아내고 비판하며 반박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래야 맞설 수 있다.
돌에 새긴 설교
계몽주의는 예술과 진리 개념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고전물리학자들은 '질'(색깔, 소리, 감촉, 맛, 냄새)이 '양'(질량과 속도와 길이, 곧 계량화 되고 수학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실재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질은 원자들이 인간의 오감에 부딪쳐 생겨난 주관적 효과라고 생각했다.
질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어 수학적으로 계량하고 헤아리고 재어 볼 수 없는 모든것을 아우르게 되었다. 도덕적 이상과 목표, 사랑과 아름다움도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환각으로 치부되었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질의 세계, 감각 인식의 세계,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며 죽어가는 현장으로서의 세계"를 거부했다.
과학은 그 자리에 "다른 세계, 곧 양의 세계, 물화된 기하학의 세계,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세계"를 들여놓았다. 그곳은 인간이 소외감을 느끼는 세계였다.
"엠블럼적 세계관"
자연을 영적. 도덕적 의미를 찾아야 할 엡블럼(기호나 상징)의 모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엠블리적 세계관에서 지식의 목표는 한 유기체를 과학에서 하듯 생리적으로 묘사하거나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생명체를 역사, 신화, 종교, 문화와 이어 주는 복잡하게 얽힌 연관 관계를 살피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잠언식 자연 접근법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한 마디로, 자연이 영적. 도덕적 실물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마음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에서 영적. 도덕적 의미를 제거했고 그로 인해 자연은 고작해야 톱니와 기어로 구성된 복잡한 기계장치로 환원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새악했던 세상, 색깔과 소리, 도덕과 의미의 시계가 한낱 정신 상태로 환원되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은 어두운 방에 갖힌 죄수, 내면의 관심사에 철저히 무관심한 바깥의 낯선 우주를 응시하는 "하찮은 보잘것없는 구경꾼"처럼 되었다.
그러ㅏ 물리학자들에게 이 세계관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리학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실재는 수학으로 계량화되는 것(양)에 한정되었다.계량화 되지 않는 것(질)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로 강등되었다.
직설적으로 말해 마음은 "인간의 경험 중에서 기계론적 물리학으로 자연에서 판독할 수 없는 모든 요소를 내버리는 편리한 쓰레기장"이 되었다. 슬프지만, 내버려진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살 마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이 계몽주의 세계관을 인간소외와 비인간화의 주범으로 본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음의 나무
질은 예술의 재료이기도 하다. 자연계의 기록자로서 예술가의 역할이 위협을 받았다.
낭만주의자들이 반대했던 것은 사실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이 불가피하게 함축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던 유물론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연을 수익을 위해 통제하고 착취해야 할 거대한 기계로 보는 계모우의 자연관을 철저히 배격했다. 많은 낭만주의 자에게 예술은 합리주의 과학과 산업이 만들어 낸 치명적인 세계에 맞설 저항의 수단이자 영적인 자연관을 회복할 수단이 되었다.
자연, 신의 언어
일부 낭만주의자들은 기독교 맥락에 머물렀다.
프리드리히에게 바위와 상록수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의사소통의 상징이었다.
'두 우주' 전략
하지만 많은 낭만주의자들은 어찌 되었든 근대 과학으로 인해 정통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고 느꼈다. 그들은 진리의 통일성을 포기하고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자신들이 혐오하는 경험주의, 합리주의, 유물론, 공리주의 같은 계몽주의 세계관을 칸트의 아래층에 안전하게 가두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와 동시에, 칸트의 위층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가치가 보호받을 수 있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타협 전략으로 계몽주의 세계관이 개념의 지도에서 지워버린 영, 자유, 의;미, 아름다움 같은 것에 모종의 인지적 영토를 보장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낭만주의자들은 "경험적 우주에서 시적 우주를 분리해 냄으로써 진리를 '합리적 진리'와 '상상의 진리'라는 두 종류, 또는 두 우주로 논리적으로 구분'하기를 바랐다.
낭만주의의 이층 진리
상상의 진리- 창조적 세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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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진리- 결정론적 세계(과학)
'자연적 진리 대 예술적 진리'
낭만주의자들은 외부 세계가 과학주의에 의해 점령되자, 마음과 상상력이 있는 내부 세계로 후퇴했다.
마음속 형이상학
'관념론'에 따르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복잡계가 아니다. 세상은 혼돈스러운 흐름이고, 인간이 그 안에 질서와 구조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자연 질서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게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창조 역할을 접수했다"고 보았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계의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칸트는 실재의 중심에 인간의 마음을 놓았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인간의 마음이 구성해 낸 것이다.
구원자 예술
계몽주의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극복할 길을 찾고 있던 낭만주의자들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자기들 것으로 삼았다. 관념론이 인간의 마음에 부여한 신과 같은 창의력에 답이 있는 것 같았다. 색깔, 소리, 의미 같은 질들이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경험주의의 주장은 더 이상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절묘한 솜씨를 발휘해 그것을 예술의 도우미로 바꾸어 놓았다. 질이 마음의 창조물이라면, 예술가는 더 이상 장인이 아니라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창조주 신이 되었다"
관념론에 힘입어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이 과학적 이성보다 실제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상상력은 무로부터 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발견하고 예술은 창조한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친숙한, '예언자 예술가'의 개념이 탄생했다.
창조적 상상력이 인간의 마음과 자연의 '혼인'을 성사시키고, "자연과의 적대적 관계에 화해"를 가져오며, 그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절망
하지만 낭만주의의 구원 계획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들이 말한 "다시 마법에 걸린 자연의 모습"이 장밋빛 안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혹시 환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빛과 영광, 우리가 듣는 것 같은 모든 달콤한 소리는 인간의 영혼에서 나온다.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는 세상에 아름다움과 목적을 부여할 능력이 없다. 낭만주의적 기획은 불가피하게 실패했고, 낭만주의자들은 지독한 환며과 절망을 경험했다.
영과 주문
낭만주의자들은 대체종교를 찾다가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에 의해 예술에서 추방되었던 초자연적 요소들을 재발견했다. 그들은 고대 신화, 동화, 민간 전설을 부활시켰다.
낭만주의 시대가 끝난 이 비전은 상징주의 운동이 이어받았다.
# 질풍노도 운동-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 계몽주의 사조에 반항하면서 감정의 해방, 개성의 존중 및 천재주의를 주장하였다. 하만과 헤르더가 선구를 이루고 쾨테와 실러 등이 중심이 되었다.
시가 종교의 대용품이 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철학 안에 영감을 주는 종교의 힘을 주입하려 했다. 고대 세계의 뉴에이지 운동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동서양의 결합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중심 개념은 궁극적 실재가 일자, 곧 절대자라는 것이었다. 이 절대자는 생각하고 느끼고 뜻을 품고 행동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본질 또는 실체였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뜻을 품거나 행동할 수 없는 비인격적 본질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한다는 말인가? 신플라톤주의의 답변은 이렇다. 일자는 존재가 너무나 충만한 나머지 해가 빛을 내고 생이 물을 ㅆㄷ아내듯 의식적인 의도 없이 다른 존재를 자동적으로 유출한다. 세계는 이렇듯 신적 존재의 유출 내지 나타남으로 이루어졌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 세상은 여러 단계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영적 존재가 이어지고(천사들의 계급처럼), 그 다음에 인간 동물, 식물이 이어지며, 끝으로 바위와 무생물이 그 뒤를 잇는다. 햇살이 어둠속으로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듯, 존재의 한 단계를 내려갈 때마다 영이 줄어들고 물질이 많아진다. 이 일련의 유출 전체를 '생명의 사다리' 또는 '존재의 거대한 사슬'이라고 불렀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일자와 재결합하여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성경도 신플라톤주의를 다루고 있다. 신플라톤주의는 주후 3세기에 생겨났지만, 신양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통용되던 많은 생각들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에서 '일자'는 그 존재의 충만함으로 자동적으로 창조한다. 그래서 일자 및 거기서 나온 모든 영적 유출이 이루는 영역을 '충만함'(신적 능력의 총채) 또는 '플레로마'(pleroma)라고 불렀다. 골로새서 1:19과 2:9에서 바울은 신성의 충만함(플레로마)이 그리스동 안에 거한다고 말했다.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더욱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여러 계급의 영적 유출물이 천사 비슷한 영적 존재로 인격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골로새서 11:16은 그들을 왕권, 주권, 권력, 권세들이라 부르고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에 대해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신다고 가르친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 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신플라톤주의가 처음 나타난 로마 제국 당시만 해도, 그 주된 매력은 기독교의 대안이 된다는 데 있었다. 그리스도 이후 첫 3세기 동안 기독교회가 너무 빨리 성장했기에 이교도들은 그에 맞설 만큼 매력적인 철학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듯했다. 그것은 철학일뿐 아니라 영적 상승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이상이기도 했다. 얼마 안 가서 이교 사상은 교회에 맞서 싸우며 신플라톤주의를 무기로 휘둘렀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결사반대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가혹한 처사를 흔히 정당화했다. 4세기의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몰아내고 이교 사상을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되돌리려 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는데, 그가 복원하려 했던 이교 사상이 바로 신플라톤주의였다.
플라톤과 근대과학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이렇게 적대적이었는데도, 교부들은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신플라톤 주의는 고대 세계의 유물론 철학자들(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 등)과 달리, 영적 영역을 어느 정도나마 인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많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신플라톤주의적 논증을 빌려 와 인간 영혼의 존재 같은 교리를 옹호하는 데 사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들의 어떤 책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역사가들은 그 책이 플로티노스의 저작이라고 본다(보다 정확한 용어인 신플라톤주의는 19세기에 와서야 만들어졌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후대에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저자는 사도 바울의 전도로 회심한 아레오파고스 관원 디오니시우스(행 17:34의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실제 저자가 시기적으로 400년 후대의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고 오늘날에는 위디오니시우스라고 불린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그의 저작을 진짜 사도시대의 것으로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그의 저작은 9세기에 요하네우스 스코투스 에우리게나가 라틴어로 번역하여 사실상 모든 중세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렇게 신플라톤주의에 물든 기독교가 철학자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등장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라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생각해보자. 그런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신이 물질계에 내재하는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다. 신의 임재가 어느 한곳에 집중되거나 국한해서 나타난다면, 어디가 가장 적당할까? 태양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영적 근원인 것처럼, 태양은 지구에 있는 생명의 물리적 근원이다. 그렇다면 태양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가장 적합한 장소는 신의 상징물 태양의 위엄에 걸맞은 유일한 자리, 우주의 중심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그리고 기타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이들의 글에는 신플라톤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흔적이 보인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작에서 태양을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신플라톤주의 문헌을 인용했다. 그는 태양을 "왕좌에 앉아 그 주위를 도는 자녀 행성들을 다스리는 우주의 램프요 마음이요 통치자"로 묘사했다. 따라서 태양중심설 개념이 생겨난 것은 경험적 증거 때문이라기보다는 영적. 철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과학사가들은 여러 철학과 종교가 근대과학의 발흥에 끼친 영향을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초기 화학자들 사이에서 신플라톤주의 이원론은 모든 자연적 실체가 물질(수동적 요소)과 내적인 신의 불꽃, 또는 활력(능동적 요소, active)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낳았다. 그들은 모든 실체의 능동적 요소가 그것이 가진 힘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약병의 라벨에 아직도 유효(active) 성분'이라고 쓰는 것은 이 영향 때문이다.
위대한 아이작 뉴턴조차도 신플라톤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의 중력론에서 두드러졌다. 기계론을 신봉한 당대의 과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는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이 있어야 작용한다고 가르쳤다.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움직이려면 부딪치는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뉴턴의 중력이론은 어떤 물리적 접촉 없이 이루어진다. 지구는 달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물리적으로 밀고 당기는 대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힘을 행사한다. 기계론을 신봉한 사상가들이 볼 때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뉴턴은 어디서 그와 같은 힘의 개념을 얻었을까?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인 능동적 요소가 창조질서 안에서 그 질서를 통해 작용하는 하나님의 내재적힘을 나타낸다고 말했던, 신플라톤주의에 물든 기독교였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종교
낭만주의자들이 영적인 자연관을 지지하는 데 쓸 수 있는선택지로 신플라톤주의를 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은유를 예술가의 창조성에 적용하기까지 했다. 예술은 자신의 내적 빛을 방출하는 램프요, 정서가 흘러넘치는 샘이었다. 상징주의 다음에 일어난 주요 운동은 '표현주의'였다.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후대의 독일 예술가들이 만들어 고갱과 반 고흐에게 소급해서 적용했다.
표현주의자들은 예술가는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려야 한다는 인상주의자들의 금언을 거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진정성
예술을 측정하는 기준은 더 이상기술이나 솜씨가 아닌 진정성이었다.
예술가는 자연ㄴ에 충실해야 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내명적 자아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내면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감각 인식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었다. 의미나 정서를 전달하는 데 유요하다면 무엇이나 허용된다.
과학의 파산
기독교 표현주의는 타락하고 죄악된 세상에 만연한 잔인함과 부패를 정직하게 대면했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기독교 표현주의 안내를 받을 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인간이 처한 고통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셨다는 복음의 놀라운 주장을 더욱 깊이 헤아릴 수 있다.
화가와 범신론자
'생물형태 추상'은 낭만주의의 영감을 받아 영적이고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표현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가 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성장하고 발달하는 유기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연에는 영적 본질, 영혼, 생명력이 퍼져 잇다는 생각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빌려왔다. "세계는 살아있고 신은 창조주가 아니라 그 영혼, 그 생명이었다."
"하나님은 비인격적 기계의 외적 창조주가 아니라 자연에 스며 있는 영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범신론(만물이 신이다)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만물이 신 안에 있다)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적 지지를 얻기 위해 뉴턴의 동시대 인물 라이프니츠의 저작에 매달렸다. 뉴턴은 모든 것이 작고 단단한 물질 입자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이 영적. 정신적 에너지의 작은 중심인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모나드'라는 용어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것이고, 라이프니츠는 그 용어를 씀으로써 자연이 영혼이나 영이 깃든 거대한 유기체임을 의미한다. 신체의 본질은 연장으로, 곧 그 크기, 모양, 운동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에 대응하는 어떤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만일 물질에 영이 스며 있다면, 우리가 흔히 영이나 마음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많은 특성, 곧 의지, 지각, 감수성, 지성 등을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결국 이 낯선 우주에 인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자연과 영적인 친족 관계에 있다.
다윈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1800년대 초에 헤겔은 절대정신(주관과 객관을 동일화하여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한 정신) 또는 절대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고 가르쳤다. 생명력은 내재적 신성, 미완의 신이 되었다. 다윈이 등장하기 오래전, 낭만주의자들은 이미 이렇게 정신이 주도하는 진화론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예외였다. 미국에서는 헤겔의 진화신학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이 더 큰 논쟁을 불러왔다. "미국에는 다윈을 환영할 대현 종교지반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만드는 그의 이론의 충격이 온전히 전해졌다."
정신 주도의 진화론은 유물론이 말하는 바와 달리, 목적과 의미가 인간의 마음에만 있거나 엄격하게 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목적과 의미는 자연 안에도 있었다. 인간 마음의 가장 심오한 갈망과 동일한 것이 자연에 퍼져있는 절대정신 안에 있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과 자연은 정신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고유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가 한 생명"이다. 진화는 신적 생명이 역사를 통해 전개되는 과정이 되었다.
"과학이 신을 우주에서 쫒아낸 듯 보였을 때, 인간은 '진화' 같은 모종의 자연적 힘을 신격화할 수밖에 없었다."
헤겔과 잘라 붙인 성경
하지만 진화를 신격화하고 보니 그 경쟁자, 곧 성경의 하나님을 폐위시킬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신학을 진화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루어졌다. 역사가 절대정신 또는 절대마음의 점진적 전개라면, 법률, 윤리, 철학, 심지어 신학 등의 관념 역시 진화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헤겔은 어떤 관념도 절대적이거나 초시간적 의미에서 참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역사의 어느 한 단계에서 참이라 여겨졌던 것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더 높은 진리'에 자리를 내어 주기 마련이다. 이런 급진적 상대주의를 '역사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늘 변하는 역사 과정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주의는 제 밑동을 자른다는 문제가 있다. 자살을 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역사주의 관념 역시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관념이 우리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역사주의도 그것이 실재와 부합하는지 아닌지 알 도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역사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해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역사 너머에 있지 않다. 따라서 역사주의자는 역사주의가 참이라는 주장을 펼칠 수 없다. 자살을 피할 길은 논리적 일관성을 포기하는 것뿐이다. 헤겔은 역사주의를 적용해 모든 견해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면서도 자신의 견해만큼은 예외로 해야 했다.
이러한 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는 이내 성경에 적용되어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식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해 온 인간이 가진 신 개념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종교의 진화에서 신 개념의 첫 단계는 토테미즘 또는 애니미즘(자연계의 모든 사물에는 영적. 생명적인 것이 있으며, 자연계의 여러 현상도 영적. 생명적인 것의 작용으로 보는 세계관 또는 원시 신앙) 이다. 다음 단계로 다신론(많은 신들)을 거쳐 단일신론(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처럼 주신이 하나), 유일신론(하나의 신)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단계는 아모스와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윤리적 유일신론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한분이실 뿐 아니라 거룩하시다고 가르쳤다.
성경은 정말 진화론적 진전을 보여주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은 창세기 1장도입부부터 윤리적 유일신론을 가르친다.
'고등비평'이라는 방법론은 구약성경을 여러부분으로 쪼개고 각 부분에 대해 다른 저작 시기와 저자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라프-벤하우젠 가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등비평, 또는 본문비평은 원문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사상의 오류를 바로잡고 성경의 여러 다른 사본들을 비교한다. 고등비평은 성경본문의 기록 연대, 저자, 문학적 구성, 문학ㅈㄱ 출처 등을 알아냐려 한다. 하지만 고등비평은 성경을 신화와 전설로 취급하는 그라프-벨하우젠 가설 같은 이론과 흔히 동일시한다.
하지만 고고학이 등장하자마자 고등비평의 주장은 고고학이 밝혀낸 여러 사실에 걸려 좌초되었다.
불교 수입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서구에 전면적으로 수입한 첫 번째 철학자가 되었다(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유럽식 불교'라고 이름 지었다). 쇼펜하우어는 영향력이 큰 미학이론도 함께 내놓았는데, 그의 동양 사상은 예술계에 깊이 침투했다.
마담 블라바츠키라는 러시아 영매는 19세기 후반에 신지학을 현대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것은 동서양 사상을 종합하여 공통분모를 추출한 신비주의로, 모든 것이 만물에 퍼져 잇는 신적 본질의 일부라고 가르쳤다. 인간의 마음은 신비적 체험을 통해 의식의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고 마침내 궁극적 실재인 절대자와 합일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추상예술, 칸디스키의 양식은 '생물형태 추상'이라고 부르는데, 그 형태가 생물체의 곡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칸디스키는 신지학에서 영감을 얻은 자신의 정신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새롭게 떠오른 원자론에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원자론을 철학적 관념론(실재는 궁극적으로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입장)을 지지하는 과학적 근거로 활용했다.
역사가들은 흔히 온갖 형태의 추상을 한데 뭉뚱그린다. 하지만 직선과 직각을 구사하는 기하학적 추상은 형식주의적(아래층)이었고, 둥글 둥글한 유기체의 모양을 하고 있는 생물형태 추상은 표현주의적(위층)이었다. 미술은 추상적이 되어 가면서도 형식주의와 표현주의라는 두 방식의 분화를 여전히 보여주었다.
건축에서도 동일한 분리를 볼 수 있다. 형식주의 건축이 기하학과 균형의 이상에 영감을 받아 유리와 철로 된 각진 상자들을 만들어 냈다면, 표현주의 건축은 운동감을 실어 유기체적 건물 내지 생물형태 건물을 만들어 냈다.
무지의 구름
부정신학의 접근 방식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의 관점이 아니라 "어떤 분이 아니신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계시지 않다 등이다. 역사가들은 부정신학의 출발점을 신플라톤주의의 창설자 플로티노스로 본다. 그는 '일자'가 인간의 모든 개념은 잘못된 것,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신성에 다가갈 유일한 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하나님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를 몰아내는 도구로 종종 부정신학을 사용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지'의 어둠과 침묵속에 들어가는 것이 그분께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부정신학은 한 번도 기독교 안에서 큰 흐름으로 자리 잡은 적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 역사 속에서 행하신 능한 일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존 케이지와 선불교
동양 범신론이 인간을 낮추어 보는이유는 출발점 자체가 비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말하는 신성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비인지적인 영적 본질이나 실체다. 그렇기 때문에, 놀랍게도 범신론은 실상 유물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 유물론은 모든것이 물질적 재료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범신론은 모든 것이 영적 재료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그 결과, 두 세계관 모두 인간의 인격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이 ㅜ원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듯, 생각하고 행동ㅎ고 느낄 줄 모르는 비인격적 힘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인격적 주체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유물론도 범신론도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둘 다 인간 안에서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특성, 인간을 바위와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특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기독교의 ㅎ하나님은 우리의 개별적 정체성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우리가 창조된 모습에 합당하게 둘도 없는 개인으로 충실히 서라고 요구한다. 동양의 신비주의와 달리, 기독교의 목표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만족스러운 것, 곧 궁극적 인격체와 열정적 사랑의 관계를 욕망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창조된 존재이기에 때때로 피조세계와 일체감을 느끼고, 그러한 순간은 강력하고 감동적인 경험으로 남는다. 이것을 성경적 형태의 '자연 신비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격적존재인 우리는 더 깊은 신비주의로 부름을 받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삼위 간의 사랑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다. 인격적이되 무한하신 하나님과 교제할때,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깊은 차원에서 우리 자신의 개성과 접촉하게 된다.
환경보호 예술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땅은 그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갈 것이며, 자연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산만 남는다.
실패로 끝난 로스코의 신
부정신학에서는 신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긍정적인 발언을 할 수 없다. 이미지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진리에 도달할 뿐이다.
후지무라와 보머
미술은 시각 언어미여 그리스도인은 그 언어를 배울 책임이 있다.
모든 세계관은 모종의 진리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잇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성경적 부대에 부어 넣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 예술가는 세속주의 예술가와 동일한 양식적 요소 중 상당수를 쓸 수 있고, 참된 것을 취하여 풍성하고 온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부대에 넣을 수 있다.
톨킨과 루이스
신약성경의 위대한 사거들은 신화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특정한 시간과 구제적인 장소에서 벌어졌고 경험적을 검증 가능한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경험적 사실의 영역이 심오한 영적 의미로 물든다. 기독교는 두 영역을 통합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이성의 요구 조건과 인간 정신의 갈망을 모두 충족시킨다.
루이스는 판타지라는 장르와 특유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신적 생명과 신적 이성(로고스)이 물질적 우주에 퍼져 있는 세계를 그려 냈다.
각 시대마다 복음은 사람들의 가장 깊은 열망을 충족시킨다. 신약 성경 시대에 그리스인은 지혜를 추구했고 유대인은 영적 능력의 표적을 찾았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25)
기독교는 둘 다를 충족시켰다. 사람들에게 '지혜'나 '영적 능력'이라는 용어의 통상적 정의 너머를 볼 마음이 있다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발겨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빈틈없는 '이성'에 이끌리는 사람도 있고, 부드러운 '낭만주의'에 따라 사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역시 모두 채워준다. 성경적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굶주림을 넉넉히 채워줄 만큼 크고 풍부하다.
하지만 낭만주의 전통은 루이스의 길을 따라 기독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범신론은 결국 세속화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같은 운동을 일으켰다. 이런 운동을 지적으로 평가하고 그 급진적 영향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위층을 통과하는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프란츠 마르크-
20세기 초 작가 헨리 애덤스
그의 마음은 "기계론적 우주론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계에 마음을 빼앗기다
기독교 대안으로 제시하는 모든 세계관이 그렇듯, 기계론적 세계관도 그 본질을 들여다 보면 대체종교, 곧 마음의 우상이었다.
애덤스가 세계관의 변화에 유독 민감했던 것은 낭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세계관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반대 흐름으로 남아 있다.
계몽주의, 곧 분석적 전통을 계승한 세계관들의 계보는 나름의 방식으로 실재를 쳐내어 상자 속에 집어넣으려 했던 세계관들을 양산했다.
그중 영향력 있는 것만 꼽아도 경험주의(감각의 상자), 합리주의(이성의 상자), 자연주의(자연의 상자), 유물론(물질의 상자)이 있었다. 이제는 낭만주의 곧 대륙 전통을 계승한 세계관 계보를 살펴볼 것이다. 이 계보에 속한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칸트의 위층인 '자유'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이 전통에서도 나름의 환원주의적 상자가 생겨났기에, 우리는 어떤 상자들이 있는지 알아내고 비판하며 반박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래야 맞설 수 있다.
돌에 새긴 설교
계몽주의는 예술과 진리 개념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고전물리학자들은 '질'(색깔, 소리, 감촉, 맛, 냄새)이 '양'(질량과 속도와 길이, 곧 계량화 되고 수학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실재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질은 원자들이 인간의 오감에 부딪쳐 생겨난 주관적 효과라고 생각했다.
질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어 수학적으로 계량하고 헤아리고 재어 볼 수 없는 모든것을 아우르게 되었다. 도덕적 이상과 목표, 사랑과 아름다움도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환각으로 치부되었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질의 세계, 감각 인식의 세계,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며 죽어가는 현장으로서의 세계"를 거부했다.
과학은 그 자리에 "다른 세계, 곧 양의 세계, 물화된 기하학의 세계, 인간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세계"를 들여놓았다. 그곳은 인간이 소외감을 느끼는 세계였다.
"엠블럼적 세계관"
자연을 영적. 도덕적 의미를 찾아야 할 엡블럼(기호나 상징)의 모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엠블리적 세계관에서 지식의 목표는 한 유기체를 과학에서 하듯 생리적으로 묘사하거나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생명체를 역사, 신화, 종교, 문화와 이어 주는 복잡하게 얽힌 연관 관계를 살피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잠언식 자연 접근법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한 마디로, 자연이 영적. 도덕적 실물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마음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에서 영적. 도덕적 의미를 제거했고 그로 인해 자연은 고작해야 톱니와 기어로 구성된 복잡한 기계장치로 환원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새악했던 세상, 색깔과 소리, 도덕과 의미의 시계가 한낱 정신 상태로 환원되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은 어두운 방에 갖힌 죄수, 내면의 관심사에 철저히 무관심한 바깥의 낯선 우주를 응시하는 "하찮은 보잘것없는 구경꾼"처럼 되었다.
그러ㅏ 물리학자들에게 이 세계관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리학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객관적 실재는 수학으로 계량화되는 것(양)에 한정되었다.계량화 되지 않는 것(질)은 인간 정신의 창조물로 강등되었다.
직설적으로 말해 마음은 "인간의 경험 중에서 기계론적 물리학으로 자연에서 판독할 수 없는 모든 요소를 내버리는 편리한 쓰레기장"이 되었다. 슬프지만, 내버려진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살 마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이 계몽주의 세계관을 인간소외와 비인간화의 주범으로 본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음의 나무
질은 예술의 재료이기도 하다. 자연계의 기록자로서 예술가의 역할이 위협을 받았다.
낭만주의자들이 반대했던 것은 사실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이 불가피하게 함축하는 것으로 제시되었던 유물론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연을 수익을 위해 통제하고 착취해야 할 거대한 기계로 보는 계모우의 자연관을 철저히 배격했다. 많은 낭만주의 자에게 예술은 합리주의 과학과 산업이 만들어 낸 치명적인 세계에 맞설 저항의 수단이자 영적인 자연관을 회복할 수단이 되었다.
자연, 신의 언어
일부 낭만주의자들은 기독교 맥락에 머물렀다.
프리드리히에게 바위와 상록수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의사소통의 상징이었다.
'두 우주' 전략
하지만 많은 낭만주의자들은 어찌 되었든 근대 과학으로 인해 정통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고 느꼈다. 그들은 진리의 통일성을 포기하고 이분법을 받아들였다. 자신들이 혐오하는 경험주의, 합리주의, 유물론, 공리주의 같은 계몽주의 세계관을 칸트의 아래층에 안전하게 가두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와 동시에, 칸트의 위층은 인간적이고 영적인 가치가 보호받을 수 있는 독립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이러한 타협 전략으로 계몽주의 세계관이 개념의 지도에서 지워버린 영, 자유, 의;미, 아름다움 같은 것에 모종의 인지적 영토를 보장해줄 수 있기를 바랐다.
낭만주의자들은 "경험적 우주에서 시적 우주를 분리해 냄으로써 진리를 '합리적 진리'와 '상상의 진리'라는 두 종류, 또는 두 우주로 논리적으로 구분'하기를 바랐다.
낭만주의의 이층 진리
상상의 진리- 창조적 세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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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진리- 결정론적 세계(과학)
'자연적 진리 대 예술적 진리'
낭만주의자들은 외부 세계가 과학주의에 의해 점령되자, 마음과 상상력이 있는 내부 세계로 후퇴했다.
마음속 형이상학
'관념론'에 따르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복잡계가 아니다. 세상은 혼돈스러운 흐름이고, 인간이 그 안에 질서와 구조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자연 질서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게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창조 역할을 접수했다"고 보았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계의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칸트는 실재의 중심에 인간의 마음을 놓았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인간의 마음이 구성해 낸 것이다.
구원자 예술
계몽주의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극복할 길을 찾고 있던 낭만주의자들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자기들 것으로 삼았다. 관념론이 인간의 마음에 부여한 신과 같은 창의력에 답이 있는 것 같았다. 색깔, 소리, 의미 같은 질들이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경험주의의 주장은 더 이상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절묘한 솜씨를 발휘해 그것을 예술의 도우미로 바꾸어 놓았다. 질이 마음의 창조물이라면, 예술가는 더 이상 장인이 아니라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창조주 신이 되었다"
관념론에 힘입어 낭만주의자들은 상상력이 과학적 이성보다 실제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상상력은 무로부터 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발견하고 예술은 창조한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친숙한, '예언자 예술가'의 개념이 탄생했다.
창조적 상상력이 인간의 마음과 자연의 '혼인'을 성사시키고, "자연과의 적대적 관계에 화해"를 가져오며, 그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절망
하지만 낭만주의의 구원 계획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들이 말한 "다시 마법에 걸린 자연의 모습"이 장밋빛 안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혹시 환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빛과 영광, 우리가 듣는 것 같은 모든 달콤한 소리는 인간의 영혼에서 나온다.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는 세상에 아름다움과 목적을 부여할 능력이 없다. 낭만주의적 기획은 불가피하게 실패했고, 낭만주의자들은 지독한 환며과 절망을 경험했다.
영과 주문
낭만주의자들은 대체종교를 찾다가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에 의해 예술에서 추방되었던 초자연적 요소들을 재발견했다. 그들은 고대 신화, 동화, 민간 전설을 부활시켰다.
낭만주의 시대가 끝난 이 비전은 상징주의 운동이 이어받았다.
# 질풍노도 운동-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 계몽주의 사조에 반항하면서 감정의 해방, 개성의 존중 및 천재주의를 주장하였다. 하만과 헤르더가 선구를 이루고 쾨테와 실러 등이 중심이 되었다.
시가 종교의 대용품이 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철학 안에 영감을 주는 종교의 힘을 주입하려 했다. 고대 세계의 뉴에이지 운동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동서양의 결합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중심 개념은 궁극적 실재가 일자, 곧 절대자라는 것이었다. 이 절대자는 생각하고 느끼고 뜻을 품고 행동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본질 또는 실체였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뜻을 품거나 행동할 수 없는 비인격적 본질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한다는 말인가? 신플라톤주의의 답변은 이렇다. 일자는 존재가 너무나 충만한 나머지 해가 빛을 내고 생이 물을 ㅆㄷ아내듯 의식적인 의도 없이 다른 존재를 자동적으로 유출한다. 세계는 이렇듯 신적 존재의 유출 내지 나타남으로 이루어졌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 세상은 여러 단계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영적 존재가 이어지고(천사들의 계급처럼), 그 다음에 인간 동물, 식물이 이어지며, 끝으로 바위와 무생물이 그 뒤를 잇는다. 햇살이 어둠속으로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듯, 존재의 한 단계를 내려갈 때마다 영이 줄어들고 물질이 많아진다. 이 일련의 유출 전체를 '생명의 사다리' 또는 '존재의 거대한 사슬'이라고 불렀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일자와 재결합하여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성경도 신플라톤주의를 다루고 있다. 신플라톤주의는 주후 3세기에 생겨났지만, 신양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통용되던 많은 생각들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에서 '일자'는 그 존재의 충만함으로 자동적으로 창조한다. 그래서 일자 및 거기서 나온 모든 영적 유출이 이루는 영역을 '충만함'(신적 능력의 총채) 또는 '플레로마'(pleroma)라고 불렀다. 골로새서 1:19과 2:9에서 바울은 신성의 충만함(플레로마)이 그리스동 안에 거한다고 말했다.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더욱이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여러 계급의 영적 유출물이 천사 비슷한 영적 존재로 인격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골로새서 11:16은 그들을 왕권, 주권, 권력, 권세들이라 부르고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에 대해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신다고 가르친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 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신플라톤주의가 처음 나타난 로마 제국 당시만 해도, 그 주된 매력은 기독교의 대안이 된다는 데 있었다. 그리스도 이후 첫 3세기 동안 기독교회가 너무 빨리 성장했기에 이교도들은 그에 맞설 만큼 매력적인 철학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듯했다. 그것은 철학일뿐 아니라 영적 상승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이상이기도 했다. 얼마 안 가서 이교 사상은 교회에 맞서 싸우며 신플라톤주의를 무기로 휘둘렀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결사반대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가혹한 처사를 흔히 정당화했다. 4세기의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몰아내고 이교 사상을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되돌리려 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는데, 그가 복원하려 했던 이교 사상이 바로 신플라톤주의였다.
플라톤과 근대과학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에 이렇게 적대적이었는데도, 교부들은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신플라톤 주의는 고대 세계의 유물론 철학자들(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 등)과 달리, 영적 영역을 어느 정도나마 인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등 많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신플라톤주의적 논증을 빌려 와 인간 영혼의 존재 같은 교리를 옹호하는 데 사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플라톤주의자들의 어떤 책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로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역사가들은 그 책이 플로티노스의 저작이라고 본다(보다 정확한 용어인 신플라톤주의는 19세기에 와서야 만들어졌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후대에 가장 널리 영향을 끼친 저자는 사도 바울의 전도로 회심한 아레오파고스 관원 디오니시우스(행 17:34의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실제 저자가 시기적으로 400년 후대의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고 오늘날에는 위디오니시우스라고 불린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그의 저작을 진짜 사도시대의 것으로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그의 저작은 9세기에 요하네우스 스코투스 에우리게나가 라틴어로 번역하여 사실상 모든 중세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렇게 신플라톤주의에 물든 기독교가 철학자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등장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라는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생각해보자. 그런 생각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신이 물질계에 내재하는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이다. 신의 임재가 어느 한곳에 집중되거나 국한해서 나타난다면, 어디가 가장 적당할까? 태양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영적 근원인 것처럼, 태양은 지구에 있는 생명의 물리적 근원이다. 그렇다면 태양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가장 적합한 장소는 신의 상징물 태양의 위엄에 걸맞은 유일한 자리, 우주의 중심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그리고 기타 태양중심설을 옹호하는 이들의 글에는 신플라톤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흔적이 보인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저작에서 태양을 "보이는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신플라톤주의 문헌을 인용했다. 그는 태양을 "왕좌에 앉아 그 주위를 도는 자녀 행성들을 다스리는 우주의 램프요 마음이요 통치자"로 묘사했다. 따라서 태양중심설 개념이 생겨난 것은 경험적 증거 때문이라기보다는 영적. 철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과학사가들은 여러 철학과 종교가 근대과학의 발흥에 끼친 영향을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초기 화학자들 사이에서 신플라톤주의 이원론은 모든 자연적 실체가 물질(수동적 요소)과 내적인 신의 불꽃, 또는 활력(능동적 요소, active)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낳았다. 그들은 모든 실체의 능동적 요소가 그것이 가진 힘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약병의 라벨에 아직도 유효(active) 성분'이라고 쓰는 것은 이 영향 때문이다.
위대한 아이작 뉴턴조차도 신플라톤주의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그의 중력론에서 두드러졌다. 기계론을 신봉한 당대의 과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는 직접적인 물리적 접촉이 있어야 작용한다고 가르쳤다.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움직이려면 부딪치는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뉴턴의 중력이론은 어떤 물리적 접촉 없이 이루어진다. 지구는 달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물리적으로 밀고 당기는 대신,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힘을 행사한다. 기계론을 신봉한 사상가들이 볼 때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뉴턴은 어디서 그와 같은 힘의 개념을 얻었을까?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인 능동적 요소가 창조질서 안에서 그 질서를 통해 작용하는 하나님의 내재적힘을 나타낸다고 말했던, 신플라톤주의에 물든 기독교였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종교
낭만주의자들이 영적인 자연관을 지지하는 데 쓸 수 있는선택지로 신플라톤주의를 택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은유를 예술가의 창조성에 적용하기까지 했다. 예술은 자신의 내적 빛을 방출하는 램프요, 정서가 흘러넘치는 샘이었다. 상징주의 다음에 일어난 주요 운동은 '표현주의'였다.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후대의 독일 예술가들이 만들어 고갱과 반 고흐에게 소급해서 적용했다.
표현주의자들은 예술가는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려야 한다는 인상주의자들의 금언을 거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진정성
예술을 측정하는 기준은 더 이상기술이나 솜씨가 아닌 진정성이었다.
예술가는 자연ㄴ에 충실해야 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내명적 자아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내면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감각 인식을 얼마든지 왜곡할 수 있었다. 의미나 정서를 전달하는 데 유요하다면 무엇이나 허용된다.
과학의 파산
기독교 표현주의는 타락하고 죄악된 세상에 만연한 잔인함과 부패를 정직하게 대면했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기독교 표현주의 안내를 받을 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인간이 처한 고통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셨다는 복음의 놀라운 주장을 더욱 깊이 헤아릴 수 있다.
화가와 범신론자
'생물형태 추상'은 낭만주의의 영감을 받아 영적이고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표현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가 정적인 기계가 아니라 성장하고 발달하는 유기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연에는 영적 본질, 영혼, 생명력이 퍼져 잇다는 생각을 신플라톤주의에서 빌려왔다. "세계는 살아있고 신은 창조주가 아니라 그 영혼, 그 생명이었다."
"하나님은 비인격적 기계의 외적 창조주가 아니라 자연에 스며 있는 영이다."
신플라톤주의는 범신론(만물이 신이다)이라기보다는 범재신론(만물이 신 안에 있다)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적 지지를 얻기 위해 뉴턴의 동시대 인물 라이프니츠의 저작에 매달렸다. 뉴턴은 모든 것이 작고 단단한 물질 입자인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이 영적. 정신적 에너지의 작은 중심인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모나드'라는 용어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것이고, 라이프니츠는 그 용어를 씀으로써 자연이 영혼이나 영이 깃든 거대한 유기체임을 의미한다. 신체의 본질은 연장으로, 곧 그 크기, 모양, 운동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에 대응하는 어떤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만일 물질에 영이 스며 있다면, 우리가 흔히 영이나 마음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많은 특성, 곧 의지, 지각, 감수성, 지성 등을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결국 이 낯선 우주에 인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자연과 영적인 친족 관계에 있다.
다윈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1800년대 초에 헤겔은 절대정신(주관과 객관을 동일화하여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한 정신) 또는 절대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고 가르쳤다. 생명력은 내재적 신성, 미완의 신이 되었다. 다윈이 등장하기 오래전, 낭만주의자들은 이미 이렇게 정신이 주도하는 진화론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예외였다. 미국에서는 헤겔의 진화신학이 드물었기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이 더 큰 논쟁을 불러왔다. "미국에는 다윈을 환영할 대현 종교지반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만드는 그의 이론의 충격이 온전히 전해졌다."
정신 주도의 진화론은 유물론이 말하는 바와 달리, 목적과 의미가 인간의 마음에만 있거나 엄격하게 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목적과 의미는 자연 안에도 있었다. 인간 마음의 가장 심오한 갈망과 동일한 것이 자연에 퍼져있는 절대정신 안에 있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과 자연은 정신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고유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우리 모두가 한 생명"이다. 진화는 신적 생명이 역사를 통해 전개되는 과정이 되었다.
"과학이 신을 우주에서 쫒아낸 듯 보였을 때, 인간은 '진화' 같은 모종의 자연적 힘을 신격화할 수밖에 없었다."
헤겔과 잘라 붙인 성경
하지만 진화를 신격화하고 보니 그 경쟁자, 곧 성경의 하나님을 폐위시킬 길을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신학을 진화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루어졌다. 역사가 절대정신 또는 절대마음의 점진적 전개라면, 법률, 윤리, 철학, 심지어 신학 등의 관념 역시 진화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헤겔은 어떤 관념도 절대적이거나 초시간적 의미에서 참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역사의 어느 한 단계에서 참이라 여겨졌던 것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더 높은 진리'에 자리를 내어 주기 마련이다. 이런 급진적 상대주의를 '역사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늘 변하는 역사 과정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주의는 제 밑동을 자른다는 문제가 있다. 자살을 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역사주의 관념 역시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관념이 우리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역사주의도 그것이 실재와 부합하는지 아닌지 알 도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역사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스스로에 대해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역사 너머에 있지 않다. 따라서 역사주의자는 역사주의가 참이라는 주장을 펼칠 수 없다. 자살을 피할 길은 논리적 일관성을 포기하는 것뿐이다. 헤겔은 역사주의를 적용해 모든 견해를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면서도 자신의 견해만큼은 예외로 해야 했다.
이러한 내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역사주의는 이내 성경에 적용되어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식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해 온 인간이 가진 신 개념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종교의 진화에서 신 개념의 첫 단계는 토테미즘 또는 애니미즘(자연계의 모든 사물에는 영적. 생명적인 것이 있으며, 자연계의 여러 현상도 영적. 생명적인 것의 작용으로 보는 세계관 또는 원시 신앙) 이다. 다음 단계로 다신론(많은 신들)을 거쳐 단일신론(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처럼 주신이 하나), 유일신론(하나의 신)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단계는 아모스와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의 윤리적 유일신론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한분이실 뿐 아니라 거룩하시다고 가르쳤다.
성경은 정말 진화론적 진전을 보여주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은 창세기 1장도입부부터 윤리적 유일신론을 가르친다.
'고등비평'이라는 방법론은 구약성경을 여러부분으로 쪼개고 각 부분에 대해 다른 저작 시기와 저자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라프-벤하우젠 가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등비평, 또는 본문비평은 원문을 재구성하기 위해 필사상의 오류를 바로잡고 성경의 여러 다른 사본들을 비교한다. 고등비평은 성경본문의 기록 연대, 저자, 문학적 구성, 문학ㅈㄱ 출처 등을 알아냐려 한다. 하지만 고등비평은 성경을 신화와 전설로 취급하는 그라프-벨하우젠 가설 같은 이론과 흔히 동일시한다.
하지만 고고학이 등장하자마자 고등비평의 주장은 고고학이 밝혀낸 여러 사실에 걸려 좌초되었다.
불교 수입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서구에 전면적으로 수입한 첫 번째 철학자가 되었다(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유럽식 불교'라고 이름 지었다). 쇼펜하우어는 영향력이 큰 미학이론도 함께 내놓았는데, 그의 동양 사상은 예술계에 깊이 침투했다.
마담 블라바츠키라는 러시아 영매는 19세기 후반에 신지학을 현대의 형태로 발전시켰다. 그것은 동서양 사상을 종합하여 공통분모를 추출한 신비주의로, 모든 것이 만물에 퍼져 잇는 신적 본질의 일부라고 가르쳤다. 인간의 마음은 신비적 체험을 통해 의식의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고 마침내 궁극적 실재인 절대자와 합일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추상예술, 칸디스키의 양식은 '생물형태 추상'이라고 부르는데, 그 형태가 생물체의 곡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칸디스키는 신지학에서 영감을 얻은 자신의 정신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새롭게 떠오른 원자론에 호소했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원자론을 철학적 관념론(실재는 궁극적으로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입장)을 지지하는 과학적 근거로 활용했다.
역사가들은 흔히 온갖 형태의 추상을 한데 뭉뚱그린다. 하지만 직선과 직각을 구사하는 기하학적 추상은 형식주의적(아래층)이었고, 둥글 둥글한 유기체의 모양을 하고 있는 생물형태 추상은 표현주의적(위층)이었다. 미술은 추상적이 되어 가면서도 형식주의와 표현주의라는 두 방식의 분화를 여전히 보여주었다.
건축에서도 동일한 분리를 볼 수 있다. 형식주의 건축이 기하학과 균형의 이상에 영감을 받아 유리와 철로 된 각진 상자들을 만들어 냈다면, 표현주의 건축은 운동감을 실어 유기체적 건물 내지 생물형태 건물을 만들어 냈다.
무지의 구름
부정신학의 접근 방식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의 관점이 아니라 "어떤 분이 아니신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계시지 않다 등이다. 역사가들은 부정신학의 출발점을 신플라톤주의의 창설자 플로티노스로 본다. 그는 '일자'가 인간의 모든 개념은 잘못된 것,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신성에 다가갈 유일한 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하나님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를 몰아내는 도구로 종종 부정신학을 사용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지'의 어둠과 침묵속에 들어가는 것이 그분께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부정신학은 한 번도 기독교 안에서 큰 흐름으로 자리 잡은 적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 역사 속에서 행하신 능한 일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이 너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존 케이지와 선불교
동양 범신론이 인간을 낮추어 보는이유는 출발점 자체가 비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말하는 신성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 비인지적인 영적 본질이나 실체다. 그렇기 때문에, 놀랍게도 범신론은 실상 유물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 유물론은 모든것이 물질적 재료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하고 범신론은 모든 것이 영적 재료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그 결과, 두 세계관 모두 인간의 인격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이 ㅜ원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듯, 생각하고 행동ㅎ고 느낄 줄 모르는 비인격적 힘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인격적 주체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따라서 유물론도 범신론도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결국 둘 다 인간 안에서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특성, 인간을 바위와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특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기독교의 ㅎ하나님은 우리의 개별적 정체성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우리가 창조된 모습에 합당하게 둘도 없는 개인으로 충실히 서라고 요구한다. 동양의 신비주의와 달리, 기독교의 목표는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만족스러운 것, 곧 궁극적 인격체와 열정적 사랑의 관계를 욕망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창조된 존재이기에 때때로 피조세계와 일체감을 느끼고, 그러한 순간은 강력하고 감동적인 경험으로 남는다. 이것을 성경적 형태의 '자연 신비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격적존재인 우리는 더 깊은 신비주의로 부름을 받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삼위 간의 사랑에 참여하라는 부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다. 인격적이되 무한하신 하나님과 교제할때,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깊은 차원에서 우리 자신의 개성과 접촉하게 된다.
환경보호 예술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땅은 그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갈 것이며, 자연이 결국 승리할 것이라고, 산만 남는다.
실패로 끝난 로스코의 신
부정신학에서는 신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긍정적인 발언을 할 수 없다. 이미지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진리에 도달할 뿐이다.
후지무라와 보머
미술은 시각 언어미여 그리스도인은 그 언어를 배울 책임이 있다.
모든 세계관은 모종의 진리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잇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성경적 부대에 부어 넣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 예술가는 세속주의 예술가와 동일한 양식적 요소 중 상당수를 쓸 수 있고, 참된 것을 취하여 풍성하고 온전한 성경적 세계관을 부대에 넣을 수 있다.
톨킨과 루이스
신약성경의 위대한 사거들은 신화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은 특정한 시간과 구제적인 장소에서 벌어졌고 경험적을 검증 가능한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경험적 사실의 영역이 심오한 영적 의미로 물든다. 기독교는 두 영역을 통합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인간이성의 요구 조건과 인간 정신의 갈망을 모두 충족시킨다.
루이스는 판타지라는 장르와 특유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신적 생명과 신적 이성(로고스)이 물질적 우주에 퍼져 있는 세계를 그려 냈다.
각 시대마다 복음은 사람들의 가장 깊은 열망을 충족시킨다. 신약 성경 시대에 그리스인은 지혜를 추구했고 유대인은 영적 능력의 표적을 찾았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25)
기독교는 둘 다를 충족시켰다. 사람들에게 '지혜'나 '영적 능력'이라는 용어의 통상적 정의 너머를 볼 마음이 있다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발겨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빈틈없는 '이성'에 이끌리는 사람도 있고, 부드러운 '낭만주의'에 따라 사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는 이 두 가지 역시 모두 채워준다. 성경적 진리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굶주림을 넉넉히 채워줄 만큼 크고 풍부하다.
하지만 낭만주의 전통은 루이스의 길을 따라 기독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범신론은 결국 세속화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같은 운동을 일으켰다. 이런 운동을 지적으로 평가하고 그 급진적 영향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위층을 통과하는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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