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세이빙 다빈치-낸시 피어시

6.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 예술: 계몽주의 유산-낸시피어시/2부 세속주의로 가는 두 갈래 길/세이빙 다빈치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알려면 오늘의 신문보다 어제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제임스 H. 빌링턴-




잭 런던의 신

자연주의는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계몽주의 세계관일 것이다.


진화와 스카렛 요한슨

자연주의가 그리는 인간은 오롯이 진화적 힘이 만들어 낸 생물체였다.
다윈주의 진화론은 그저 과학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고전문학에서부터 할리우드를 거쳐 우리 거실에까지 스면든 세계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노벨상을 타다

인공물을 규정하는것은 그 목표와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원리 개념은 배아부터 성인까지의 발달 과정을 지배하는 "현대의 유전 프로그램 개념과 놀랄 만큼 유사하며,이는 사전에 부과된 계획"에 해당한다.


'간격의 신'은 없다

생물체를 지배하는 계획이나 목적 개념은 성경적 세계관과 잘 맞는다.
자연신학


무의미한 유물론

다윈의 생각은 "생명의 드라마에서 신이 인간 종에게 정하여준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순전히 자연 과정의 우연하고 우발적인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진화론 논쟁의 핵심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하. "정신이 물질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물질에서 정신이 나왔는가?" 유신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정신이 기본이다. 하나님이 명령을 내려 빨게 세상을 창조하셨든, 아니면 점진적 과정을 통해 서서히 창조하셨든, 정신은 우주의 근본적인 창조력이다. 다윈은이런 생각을 뒤집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물질이 주된 창조력이고, 정신은 진화의 역사에서 상당히 뒤늦게 등장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뇌가 존재할 뿐이다. "정신과 영혼, 신까지도 신경망이 복잡해져서 생겨나는 놀라운 결과물을 표현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스스로 제 발등을 찍는다는 데 있다. 모든 생각이 "신경망이 복잡해져서 생겨나는 결과"일 뿐이라면, 모든 관념이 다 같은 상황에서 유물론이라는 관념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유물론 또한 뇌에서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부산물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유물론은 자살을 저지른다. 자기 범주의 올가미에 걸려들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만다.
어떤 철학이 자기가 만들어 낸 설명의 범주에서 자기만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결정적인 결함이 잇다는 분명한 표지다.


종교 산산조각 내기

"다윈의 진화론은 기계론과 유물론의 핵심 강령이었고" 예술과 인문학을 포함해 "대부분의 서구 사상이 펼쳐진 무대가 되었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연을 엄청나고 강력하고 무자비하고 무심한 대상으로 묘사했다.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의 보잘것없고 하찮은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졸라의 인간 동물학


무신론이 지루한 이유

세계관의 취지는 인간 경험이라는 기본 자료를 설명하자는 것이지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관은 이중의 시험대를 통과해야 한다. 첫째, 내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가? 둘째, 실제 세계에 들어맞는가? 이 두 번째 질문은 성경적 형태의 실용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결국 세계관의 취지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 현실을 항해할 정신의 지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지도가 실세계를 헤쳐 나가는 데 유용하지 않다면 제대로 된 지침이 될 수 없다. 세계관을 실험할 때는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제 역할을 잘 감당하는지 보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비성경적 세계관은 모두 어떤 지점에서 실기 시험에 실패하기 마련이다. 지지자들이 그것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려 해도 여의치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실제 모습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도 성경이 말하는 인간 본성관이 옳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자의 현실 지도가 "너무 작다"고 표현할 수도 있겟다. 그 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실재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안내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들은 자꾸만 지도에서 벗어나 그들의 지도가 해명해 주지 못하는 '미지의 땅'으로 들어서게 된다.


뒤죽박죽 추론

나의 세계관을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세계관에 무엇인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신호다. 실용적인 시험대를 거치게 되면, 기독교 세계관의 우얼성이 잘 드러난다. 기독교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과 선택과 행동의 최고의 주체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어떻게 인간이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역량을 갖춘 인격적 주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할 지적 기반 위에 서 있다. 기독교는 인간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충분히 큰 지도를 제공한다.성경적 세계관은 실세계에 들어맞는다.



기독교 사실주의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사건이 평민들의 삶에서 벌어지지만, "중요성으로 따지면 세상을 뒤집어엎을 만한 것이다." 각 개인이 우주의 중요성을 띤 도덕적 드라만에 참여한다. 그 결과, 성경은 모든 시대의 문학을 바꾸어 놓을 사실주의 양식을 도입했다. 성경적 사실주의는 세속적 사실주의와 달리 환원주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보통 사람과 평범한 역사의 존엄을 알아보았다. 보통 사람이나 평범한 일은 그저 평범하고 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펼쳐가시는 구원 계획의 요소였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와 성경

성경적 사실주의가 역사를 제대로 읽기 위한 열쇠로 제시한 것은 모형론이었다. 이것은 사건을 모형이나 예표로 인식하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역사는 엄연한 사실들의 연속이 아니었다. 역사는 모형과 상징으로 가득한 예술작품, 일종의 시였다. 모형론은 인간이 물질계와 영계라는서로 이어진, 의미의 두 영역 안에 산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순전히 역사적인 사건이 추가적인 차원의 의미에 동시에 참여한다.

먼 옛날 이스라엘은

불붙은 시내산만

본 것이 아니라

복음도 배웠다.

모형과 예표라는 거울 안에서

구주의 얼굴을 보았다.

성경의 모형론에서 생겨난 역사 이해에 따르면, 평범하고 흔한 사건에는 다양한 차원의 의미가 들어 잇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역사의 한 요소이기에 엄청난 위엄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모형론은 문학적 장치 그 이상이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우주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모든 개인의 생애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원형이며, 그것을 본으로 삼을 때 고난과 기쁨에 여러 겹의 영적 의미가 더해진다. 또한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 엮어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이 된다.


헤밍웨이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

추상적인 개념을 거부하는 자연주의 문학가들은 그들의 자연주의 세계관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 자연주의 세계관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이고, 자주 그렇듯이 그들의 비판은 선별적이다. 비판은 다른 사람의 세계관에만 적용된다.


뒤샹이 우리 면전에 집어던진 것



자연에서 하나님 배제하기

다윈의 진화론을 이미 받아들인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자연주의와 실증주의 같은 철학을 채택했다. 그러나 순서가 거구로 진행되기도 한다. 다윈은 자연주의와 실증주의를 받아들이고 나서 자연선택설에 도달했다.
"실증주의는 무신론 못지않게 효과적으로 신을 자연에서 (실재에서는 아닐지라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말은 일단 철학에서 실증주의를 받아들이면, 과학에서는 다윈주의 또는 그와 상당히 비슷한 학설이 거의 불가피하게 따라온다는 의미다.


자유주의 분서자들

실증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논리실증주의였다. 논리실증주의는 어떤 면에서 두 철학, 곧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흄은 믿을만한 지식은 첫째, 감각에서 도출되는 관념과 둘째,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관념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가 염두에 둔 지식은 과학이었다.


큰 질문을 포기하다

분석철학은 2,500년 동안 철학의 심장부에 놓여 있던 거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폐기했다.
철학은 논리적 형식주의로 인해 수학적 정밀성이라는 아우라를 덧입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비판자들은 이것을 '공허한 형식주의'라 성토하며 철학이 진리를 찾는 데는 더 이상 관심이 없고 명제들의 형식성을 조사하는 데만 여념이 없다고 비판했다.


입체주의 빌딩





바우하우스 감옥

국제주의 양식은 개별성을 희생하고 균일성을 강조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 세계관을 건축으로 표현했다. 지금도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볼수 있는 쇠락해가는 주택단지들은 "유물론과 합리주의가 이해하는 인간 생명"의 가시적인 표현으로 남게 될 것이다.
과념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 그들이 어떤 건물을 짓는지에도 영향을 끼친다. 국제주의 양식의 기하학적 선이 미학적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우하우스 양식의 가구를 집에 갖추어 놓고 좋아하는 사람이 잇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양식에 영감을 준 유무론과 합리주의는 합당한 세계관이 아니다. 그것들이 거둔 수확물은 망가진 살과 쓸쓸한 동네였다.


ABC 예술

논리실증주의의 시각적 형태가 바우하우스였다면, 언어분석의 시각적 형태는 미니멀리즘이었다.



벽돌 더미


우주가 비인격적인 자연적 힘의 산물이라고 보는 세계관은 예술에서 인격적 창조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표혀뇐다. 단 하나뿐인 개별성의 표현이 합리적 균일성으로 대체된다.

모든 인간은 인격적인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만든 작품에 그의 개성이 전혀 표현되지 않는 일은 잇을 수 없다. 성경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사고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에서는 모종의 방식으로 개성이 베어나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은어떤 식으로든 표현될 수밖에 없다.



회화는 물감일 뿐이다





초월성의 상실

형식주의와 분석철학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둘 다 초월적 실재에 대한 큰 질문을 외면했다.



기독교적 상식

# 개혁주의 인식론: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명제적 증거나 타당한 논변이 없더라도 신을 믿는 것은 정당하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일상적인 지각에 의한 믿음, 기억에 의한 믿음,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확히 기초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개혖주의 신학자 칼뱅의 '신성에 대한 의식'에서 착상을 얻어기에 개혁주의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철학이 그렇듯 분석철학에도 지리의 알맹이가 들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만 정합성을 갖는다.
사실, 분석철학의 뿌리도 원래 성경적 원리에서 나왔다. 분석적 철학은 20세기 초에 생겨났지만, 그것에 분분적으로 영감을 준 이전 시대의 철학이 바로 '상식 실재론'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이 창조세계에 '들어맞도록' 하나님이 설계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상식 실재론에서 '상이라는 용어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또는 "다들 공유하는"의 뜻이다. 모든 문화권과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받아들이는 관념이 있다.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물질계는 실재한다. 진정한 선과 악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다. 이성은 진리의 타당한 시험대다"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관념은 보편적일 뿐 아니라 실세계에서 살아가는 데도 꼭 필요하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관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리드는 이것을 일컬어 "자명하다"고 표현했다.
철학이 탈세속화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세속화 과정을 역정시킬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한다.



거룩한 미니멀리즘

크리스천 예술가들이 현대 철학의 영감을 받은 양식적 요소를 빌려 오되 고전적인 기독교 전통의 요소를 활용하여 작품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본다. 그들은 완전히 현대적이면서도 성경적 세계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다.



세계관을 '보다'

계몽주의 흐름의 사상과 분석적 전통
모든 세속주의 세계관은 어떤 식으로든 환원주의적이다. 창조세계의 한 조각을 붙잡고 그것을 전부로 취급한다. 그 규정된 범주 바깥에 놓이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어떤 비성경적 세계관도 실재 모두를 해명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 상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세계관은 실패한다. 창조된 실재 모두를 해명할 자원을 갖추지 못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적 세계관은 창조세계의 어떤 부분도 신격화시킬 필요가 없고, 어떤 부분도 부인하거나 폄하할 필요가 없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나 선한 것을 발견하면 긍정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술과 문학에 힘입어 눈앞에서 펼쳐지는 세계관을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 세대에 성경적 진리를 전하는 일을 더 잘 준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