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위대하고 급진적인 사상이라도,
삶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개인들 안에서 구현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에리히 프롬
다섯 번째 복음서
소매를 걷어붙이라
그리스도인은 현대 문화의 타락을 비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소매를 걷어붙이고 긍정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 나쁜 문화는 좋은 문화로만 몰아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빛의 은유에 따라 어둠과 절망의 장소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광채로 그곳을 비추어야 한다. 소금의 은유는 그리스도인이 부패와 분열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야 한다.
가정의 선교사
그리스도인 부모라 해도 자녀가 적대적인 세계관을 접하지 않게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저항의 기술을 기르도록 도울 수는 있다. 거짓 관념들을 알아보고 제대로 파악한 성경적 관념으로 거기에 대응할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리스도인은 외국 땅에 나가지 않아도 선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선교사는 토착 문화를 주의 깊게 감별하여 어떤 측면을 취할 수 있고 어떤 측면을 거부해야 하는지 결정한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진리라는 다림줄에 비추어 인간의 모든 문화를 평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동시에 성경과 모순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한다. 그래야 문화에 균형 있게 접근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영혼의 정크푸드
기독교 원시주의 예술. 윌리엄 H. 존슨의 「갈보리 산」(1944)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움과 미학적 힘을 가진 모든 작품을 즐길 자유가 있다. "우리는 예술작품의 명시적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 예술적 기술을 인정할 수 있고, 미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음을 인정할 수도 있다."_진 에드워스 비스.
반면, 예술작품이 내용면에서는 분명히 성경적인 것이라 해도 예술적 가치가 거의 또는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메시지에 동의한다는 이유만으로 조악한 싸구려 종교예술품을 받아들여 미적 감식력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여러 세대를 거쳐 아이들이 이런 달콤한 이미지를 접하고 자라면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왜 피상적 감상주의에 매력을 느낄까? 그들 나름의 일이층 이원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속(聖俗)의 분리라고 부른다.
문제는 여적인 것이 위쪽으로 옮겨지면, 예배는 감정을 발산하는 자리 정도로 쪼그라든다는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현실의 죄와 슬픔, 갈등과 소외를 상대하도록 준비시키는 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잠깐의 도피처가 된다. 성속 이원론은 하나님의 진리를 평범한 세상에서 분리시켜 위층에 격리시키는데, 이것은 평범한 세상을 구속할 하나님의 능력을 은연중에 부인하는 처사다. "성속 이원론에 따르면 유물론적 세계에서 예술과 예배는 완전히 쫓겨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실제 삶은 구제불능의 것으로 버림받는다."
기독교 예술은 구제불능의 것은 없다는 확신, 예수께서 친히 인간의 가장 어두운 경험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생명과 갱신의 근원으로 변화시키셨다는 든든한 확신에서 싹터야 한다. 온전한 기독교적 예술작품은 성경적 세계관의 세 요소인 창조.타락.구속을 모두 담아내야 한다. 그리고 항상 구속의 암시를 제공해야 한다. 아무리 인격이 저속하고 부패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구속받을 수 있는 존엄한 존재로 그려져야 한다. 희망의 빛이 어둠을 꿰뚫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예술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 것이다.
문화에 다시 도덕을
첫째, 교회는 부정적 저항에 몰두하는 자세를 넘어서야 한다.
"문화의 쇠퇴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은 나쁜 문화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하고 건강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퇴폐적인 문화의 검열이 아니라 기독교 안팎을 아울러 건강한 예술의 창작과 지원에 힘을 써야 한다." 대중적 시위와 보이콧에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비판도 예술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장기적 해결책은 인간의 조건을 제대로 담아내는 인도적이고 건강한 대안을 창조할 크리스천 미술가, 음악가, 저술가, 시나리오작가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재능 착취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진정한 창조성을 억압하는 세력에도 맞서야 한다.
"하나님의 은사가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 그분이 주신 소명이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_필립 라이큰(Philip Ryken의 「하나님을 위한 예술」에서)
그리스도인이 대필 작가를 쓰는 그런 착취적 관행을 용인하는 것은 , 입으로 뭐라고 말하건 실제로는 창조적 활동이나 지적 활동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과 같다. 교회가 예술가에게 재능을 발휘하라고 하면서 그에 대한 '합당한' 공로와 명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창조성을 하찮게 여긴다고 자백하는 꼴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해결하려면 창세기에 주어진 문화명령을 실천할 '일의 신학'을 개발해야 한다.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그분의 성품을 반영하듯, 우리가 창조하는 물건들은 우리의 성품을 반영한다. '일하는 사람'은 그의 생산물을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드러낸다. "그는 그 안에 객관적으로 나타난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드러낸다."
그리스도인이 문화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문화 창조를 저해하는 관행을 제대로 뜯어보아야 한다. 지도자의 역할은 평신도들이 밖으로 나가 전선에서 일하도록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데 있다. 목사가 "교인들의 팔을 떠받쳐야 하고, 그렇게 힘을 얻은 교인들이" 음악, 미술, 정치, 법, 과학, 사업 분야로 "나가서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도그마는 드라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슈퍼스타 리더들의 업적을 통해 대리적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통해 구원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예술가로 부름을 받았다. 예술에 가까운 경영, 기업가 정신, 과학적 발견이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가 빚어낸 아름다운 삶으로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신명 나고 너무나 강렬한 드라마다. 성경의 교리는 그 자체가 우주 역사의 흥미진진한 줄거리인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압도한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인간이 인간을 압제하는 것은 부질없는 인간사에서 따분할 만큼 흔한 기록이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압제한다는 것은.......참으로 놀라운 드라마다. 어느 저널리스트라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다면 뉴스거리임을 알아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뉴스라고, 그것도 '좋은 뉴스'(good news), 곧 복음(福音)이라고 불렀다."_도로시 세이어즈
더욱 놀랍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드라마에 참여할 기회를 받았다. 성경의 교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구속 계획에 참여할 때 세계를 뒤집는 혁명적 중요성을 지닌 삶을 살 수 있다.
교회의 예술가와 작가들은 복음의 드라마와 흥분을 전달할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그들을 길들이거나 착취하는 대신, 핵심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들은 예술 창작과 저술 사역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담긴 아름다움과 우주적 목적을 알아보도록 돕는다.
교회는 예술작품이다
복음의 타당성 구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집단적 삶이다. 모든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낸 편지다. 외부인들은 교회에서 은혜와 용서가 넘쳐 나는 아름다운 관계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아름다운 정의와, 사람이 일하는 모든 분야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창의성을 볼 때 교회 안으로 이끌려 들어올 것이다.
교회 자체가 최고의 변증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세워진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고 정의롭고 용서하며 생명을 주는 공동체를 볼 때,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정의로우시고 용서를 베푸시며 생명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_데니스 홀링거(Dennis Hollinger)
기독교 공동체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복음의 초월적 실재가 분명히 드러난다. 교회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의 가시적이고 집단적인 표현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교회 때문에 복음이 신빙성을 잃기가 그만큼 쉽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적 세계관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설교할지라도, 그들이 끊임없는 성화의 과정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그 세계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을 것이고,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사리사욕과 야망으로 우리의 인식이 완전히 흐려지면 우리는 말 그대로 어떤 영적 진리는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옳은 일을 행할 의지가 있어야 옳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성경적 세계관을 기르기 위해 각 사람은 먼저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약하고 죄의 유혹을 받는지 철저히 살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화의 과정에 나서야 한다.
보수주의를 넘어서
이러한 인격의 변화 없이 세계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저 교만과 자기주장의 또 다른 구실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세계관을 지적 체계로만 여기거나 복음주의계의 최신 유행 정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그 세계관에 비추어 가장 깊은 욕구까지 변화 받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기 원하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우리 삶 전체를 '산 제물'로 제단에 바쳐야 한다고 촉구하는 대목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성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힘입어 정신과 몸과 마음과 영의 전 자아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삶과 유리된 기독교 세계관은 교만과 공허한 지성주의에 그칠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킬 뿐 아니라, 사람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려 힘써야 한다."_그레셤 메이천
우리는 "모든 과학이 하나의 위대한 확신으로 수렴될 때, 모든 예술이 하나의 위대한 목적에 바쳐질 때, 예수님의 정제하고 고결하게 하는 영향력이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에 스며들 때, 노든 생각이 사로잡혀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때"를 바라보며 일하기도 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혁명적 비전에 이끌려 전진해야 한다.
"기독교는 보수적이지 않고 혁명적이다." '보수적'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현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혁명가가 되라고, 현 상태를 뒤집는 혁명가가 되라고 가르쳐야 한다."_프란시스 쉐퍼
우리는 거짓 우상과 그것들이 우리 머리와 가슴에 휘두르는 영향력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사명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전선에 나아가 세속적 세계관의 포로가 된 사회를 해방시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고 교회를 그 안일함에서 흔들어 깨우며, 종교적 완곡어법을 찢어 버리고 위선과 독선을 폭로할 이들, 숨 막히게 아름다운 구원을 드러내기에 예술가보다 더 잘 준비된 이들이 있을까? 바흐처럼, 바로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영적 부흥의 영감을 제공하고 세계적인 문화 혁명에 불을 댕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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