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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사도행전-박영선 목사

2.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다 / 1 처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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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1장 15-26절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는 데 있습니다. 맛디아라는 사람을 그 열두 사도 중에 하나로 뽑아 전열을 정비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일을 수행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첫걸음을 뗐다는 의미입니다.
결정을 한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자유인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권리입니다. 제자들이 결정을 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굴복하거나 강요되는 일이 아니고 본인들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동시에 분명히 순종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행한 순종적 행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결정이요 결심이요 선택으로서 자유권이기도 합니다. 이 둘을 어떻게 병존시킬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오늘 본문이 가르치려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인이 된다, 신앙인이 된다, 신앙적인 책임을 진다, 실천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만이 가치를 만들고, 질서를 만들고, 의미를 창출하고 유지하고 완성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의 이론이나 이상이나 규칙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인격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자유의 본질은 진리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그 가치를 행사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그가 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 붙잡혀 있습니다. 죄밖에 지을 게 없습니다. 죄밖에 지을 게 없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면 생명이 없고 진리가 없고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도, 만들 수도 없고, 유지할 어떤 것도, 완성할 어떤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헛되게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헛되든지, 성실하게 헛되든지, 정직하게 헛되든지, 어떻게 해도 헛될 뿐입니다.
자유인은 가치 있는 존재로서 선택권을 가집니다. 의존적이고 누구에게 붙잡혀있는 정도를 지나 본인이 자신의 결정을 행사할 권리를 가집니다. 그 권리는 그가 가진 신분과 가치의 높이를 말해줍니다.
자유는 선택권을 하나의 권리로 가지지만, 그 선택권이 자유의 본질은 아닙니다.
자유의 본질은 진리입니다. 가치와 생명의 문제입니다. 진리에 속할 때 비로소 선택권을 가집니다. 순종이란 이 가치, 곧 생명의 근원이시요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서만 가치와 생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는 선택권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선택권은 가치와 생명을 가지지 않고는 존재할 수도 없고 행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 자유를 초대교회가 제일 첫 번째 반응으로 행사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가지게 된 부활 생명의 권세를 행사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정하여 책임지기로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냥 구박받고 살다가 내게 오너라” 이렇게 응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하자면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방법이 너무 신비하고 커서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실패가 끝이 아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전도할 때 떨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사상이나 하나의 이해로 나타날까 봐 떨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이해의 내용에서 멈출까 봐 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내용을 설명하여 납득시키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저들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자신이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로막을까 봐 떨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통해서만 부활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로 살아갈 때 당황하는 것은, 내가 곧 죽을 것 같고 나를 보는 자들도 함께 그것으로 끝인 것 같은 상황들 앞에서 내가 그 상황을 바꿔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것을 기억해서 죽은 다음에 일어나는 부활을 향하여 책임 있게 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그것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삶을 살아가는데 큰 약점, 큰 방해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을 거론하고 있고 기독교라는 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권세와 가치의 주인이 세상이라 여기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활 생명으로 가는 영생의 축복이자 약속으로 우리에게 보상하시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안 주신다는 말입니다. 약속하고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주께서 강하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감수하는 인생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부활 생명을 사는 자들이 기쁜 순종을 선택하고 결정하고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허락하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과 권리들은 하나님의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답니다. 실패하셔도 손해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모든 일을 통해 여러분이 점점 하나님께로 떠밀려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잘되면 잘돼서 하나님께로 한 걸음 더 오고, 안 되면 안 돼서 하나님께로 밀려옵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성공하면 성공해서 하나님을 찾을 일이 없고, 실패하면 실패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안 그렇습니까?
실패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완벽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활 생명을 허락한 자녀라는 약속과 실제적인 능력 속에서 존재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끝난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무엇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부활의 길이었던 것같이 우리의 실패와 부족은 결단코 하나님의 일과 그의 영광과 그의 자녀로 사는 우리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손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하다. 그래서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면 그만입니다. 무엇이 겁나십니까?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더 많은 실수, 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흠 없고, 전능하고, 잘났고, 업적이 무한한 것은 다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오늘을 견디는 삶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긴 이 신약시대가 아버지께서 정하신 완성의 날까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보류된 시간이라는 것,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살아내셔야 합니다. 인생은 고난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넉넉하게 안 하십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육체에 채웁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어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셔야 합니다. 무엇을 살아낸다는 것일까요? 여러분 각자에게 준 시간과 공간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수님 안에서 본 자, 십자가로 부활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자녀, 그 부활 생명의 증거와 약속과 축복을 받은 자, 그것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로서 이 세상이 주는 현실적 위협과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괴로움을 견디셔야 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세상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영원한 나라를 알고 있는 자로서 반응하십시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견디는 겁니다. 울어야 할 때도 있고, 도저히 견디지 못해 화를 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닌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산다는 것, 자기의 인생을 신앙으로 책임진다는 것은 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입니다. ‘내게서 이 가시를 빼주십시오’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를 여러분이 감수하셔야 합니다. ‘제가 늘 틀리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쓸모도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런데 이 말만 하고 실천이 안 됩니다.’ 그러니 멋있게 하려고 하시지 말고 오늘 주어진 삶에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그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우시고 신음하시고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그 자리를 지키시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만드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이천 년 역사의 증언입니다.
앉아서 울고, 앉아서 화를 내시고, 그 자리를 지키시면 하나님이 거기에서 기적의 나무를 키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를 지켜 우리가 죽어 나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부활 생명의 나무를 기르시는 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