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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사도행전-박영선 목사

1. 세상 속에 남겨지다 / 1 처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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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도행전 1장 6-14절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이 승천한 현실

너희가 권능을 받는 것은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답답해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바로 하나님이 요구한 현실이라는 것을 놓치면 우리에게는 원망과 치성 외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 현실이 하나님이 요구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우리는 제대로 된 신앙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과 어떻게 마주쳐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가 필요한 시대

기도란 무엇일까요? 함께 계셔야 하는 주님이 없어서 남은 것이 기도밖에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떠나가신 주님, 약속과 하나님의 뜻만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 그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부활하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계시지 않는 현실에 처한 성도들에게 남겨진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보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신약시대란 구약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예수님 이전 시대는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로는 부활이 죽음을 이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시대가 구약시대고, 부활이 죽음을 이기는 시대가 신약시대입니다. 새로운 약속입니다. 옛 약속 속에는 이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옛 약속에도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예언되어 있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때는 아직 죽음을 이긴 부활 승리가 현실과 역사 속에 사건으로는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때는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지 않았기에 죽음이 끝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로는 부활이 죽음을 이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시대를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 모든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그 전 시대와 이렇게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죽음이 모든 권세를 가졌던 시대와 다른 시대, 새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너 그렇게 살면 죽어’, ‘너 약하면 죽어’, ‘너 물러나면 죽어’입니다. 이런 시대에 살다가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으면 다 이겨’라는 시대에 온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 생명이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해서 자기의 인생과 생명을 보라는 말씀으로의 초대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옛 시대가 죽음이 끝인 시대라는 말은 살아있는 동안이 전부고,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런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역사와 세계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아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관, 인간의 의미와 운명을 보는 눈이 바뀐 시대를 살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죽어도 좋습니까? 죽어도 좋다는 말은 결사각오가 아닙니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닌, 죽음을 극복한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은 죽으면 살려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으면 끝나는, 죽음이 최고의 권력인 세상이 아닌 세상을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의 최고의 무기는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과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환경 속에 살아갑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는 말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신 방식, 예수께서 가지신 인생에 대한 이해, 예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목적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려고 했던 것은 세상이 전부인 것으로 사는 것과는 단순히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원리와 내용과 목적과 가치가 다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는 모습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성육신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습니다. 인간들을 섬기시고 죽으시고 그리하여 영광의 자리, 부활의 승리로 들어가셨습니다.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인간의 가치나 존재론과 같은 모든 것이 전부 달라집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한 완벽한 구체적인 증거인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 그의 성육신과 섬김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맞게 내가 사는 것입니다.

권력이나 윤리가 아닌 실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셔서 교회를 이루십니다. 교회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칭하는 신약시대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님 안에서 불러서 예수님과 묶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는 어디까지일까요? 가장 좁게 신앙의 동지들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우리가 아직 고난 속에 살아야 하는 이 인생과 환경과 조건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장 넓게 보면 역사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종합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 증인이 되어 그것을 전하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전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허락하셨다’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소식을 전하러 갑니다. 우리 먼저 믿은 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전해서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성립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람들을 붙잡고 예수님 믿으라고 강요하는 데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라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과 환경과 사회와 배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을 전부로 아는 구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앞에서 먼저 믿은 자들이 ‘부활 생명을 가진 자는 무엇이 다른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을 목적하는 삶을 사는가’ 하는 차원에서 구별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먼저 믿은 자의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을 지지고 볶아서 결국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난에 찬 인생 속에서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을 수는 없잖아” 하면서 발버둥을 치며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윤리도 없고 이상도 없고 가치도 없이, 다만 존재를 위해 악하고 미련하고 어둡게 사는 것과 다르게 삽니다. ‘죽을 수는 없잖아’가 겁이 안 나는 삶을 삽니다. 인생에 주어진 실존적인 시험과 위협과 유혹 속에 살면서 그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것으로 채울 수도 없고 그것으로 방해도 받지 않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가진 자답게 고난을, 위기를, 유혹을, 시험을, 억울함을 극복하고 감수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감수하고, 그렇게 했을 때 보상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삶을 삽니다.
존재 자체가 다른 삶입니다.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여기서 양보를 하는가?” “저 사람은 왜 저기서 질 수 있는가?” “무엇이 저 사람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는가?” 그래서 이런 궁금증들이 산지사방에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그것이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실존적입니다. 실존적이라는 말은 삶의 한가운데서 생명을 위협하고, 세상의 가치로 시험하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름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네가 남은 구원하였는데, 너는 왜 죽느냐? 네가 메시아라면 내려와 봐라’ 하는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은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볼 때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말과 명분과 시위와 봉사 같은 것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존재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정치적·사회적 기반이 없어서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를 부르신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것은 그가 기반과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정치적·사회적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그네가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인생을 살지만 그가 복의 근원입니다.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그를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빛이고 소금입니다. 그 싸움을 평생 합니다. 결국 세상은 거짓말이었구나. 세상이 준다고 하는 보상은 결국 보상이 되지 않는구나’를 알아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를 아는 자리에 오면 그것이 신자 인생의 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삼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너머에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시작입니다. 너희는 새 시대를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싸워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보상받거나 증명받으려고 하지 마라. 세상 속에서, 그들 옆에서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살면서, 그들에게서 여러분이 다르다는 증언을 받아내라.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해서 네 위치를 확보하지 마라. 숨기고 감추어지고 세상에 떠밀려가는 속에서, 억울함과 누명과 오해와 욱여쌈과 비난 속에서, 세상이 전부가 아닌 사람으로 살라. 그들이 당신을 보고 왜 그들과 다른지 묻게 해라.’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을 남겨두고 올라가시자 제자들은 얼이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 예수는 올라가심을 본 대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신앙의 내용을 너희 삶에서 순종해라.’ 이렇게 사도행전은 시작합니다. 정신 차리고, 긴장하시고, 겁을 먹고, 그러나 도망가지 말고 사도행전이 끝날 때까지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슨 권세를 가졌고, 무슨 위협과 시험과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지, 무슨 힘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겸손하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