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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혁명이 시작된 날-톰 라이트

02. 십자가의 의미 찾기, 그 과거와 현재 / I.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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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도마복음 같은 책들)에서 그런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런 책들은 전체 그림에서 십자가를 지워 버리고, 부활을 몸과 무관한 변화로 재정의하고, 예수님을 기묘한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축소해 버렸다. 이런 접근법은 어떤 이유에서든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는 일부 현대인들에게서도 열렬한 관심을 받았다.
십자가를 더 잘 이해하려는 이유는 고도의 십자말풀이를 해결했다고 자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약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역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십자가를 통해 바로잡힌 우리가 세상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혁명은 바로 그렇게 역사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해하려는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바울은 악에는 아이가 되되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라고 고린도교회에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압도적으로 경험한 것을 자신이 느끼는 혼란에 대한 변명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랑도 이해를 추구하며,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다.

● 모델과 교리

● 예수님은 영단번에 형벌을 받으셨다?

‘속죄’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 미래, 특히 사후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과 직결된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몸의 부활이 여전히 공식 신조였지만, 중세 후기로 갈수록 궁극적 미래를 새 창조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신구교를 포함한 서구 기독교에 흔한 ‘천국’의 그림으로 상상했다.
(내가 보기에) 종교개혁가들은 잘못된 질문에 옳은 답을 주는 과정에서, 더 큰 천국과 지옥의 근본 틀에 도전하거나 새 창조와 부활이 실제로 무슨 의미이며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생각하는 데 실패했다.
에베소서 1장 10절은 메시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모으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현세를 사는 인류는 ‘천국’에 있는 진짜 ‘집’에서 ‘추방당했다’고 주장한 것은 신약성경이 아니라(그렇다고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바로 플루타르코스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이 구속받은 백성의 부활체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한다면, 우리가 죄와 죽음을 넘어서서 그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도 재고해야 마땅하다. 속죄(인류가 자신의 역경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의 목적 가운데 의도된 자리로 회복되는 방법)는 종말론(하나님이 세상과 인류에 궁극적으로 의도하시는 바)과 들어맞아야 한다.
우리가 종말론을 다시 생각한다면, 속죄에 대한 관점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실제로 이 둘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다. 십자가는 무언가가 발생한 순간인데, 그 결과로 하나님의 미래 계획이 시행되면서 세상이 뒤바뀌었다. 바로 그때 거기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첫 번째 표지였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계몽주의의 본질인 에피쿠로스주의는 땅과 하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큰 간극이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성경적 우주론을 받아들여 초연한 영성(이 땅에서는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하늘의 경건)과 현실 도피적 종말론(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는 것)을 선택했다.
서구식 경건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천상에서의(즉 세상과 관련 없는) 내 구원과 내 구주에만 집중했다.
18세기 다수의 유럽 문화에서 이신론과 에피쿠로스주의를 수용하고 있을 때, 개인의 죄(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와 세상의 악의 문제(인간의 부정행위, 폭력, 전쟁 등은 물론, 지진과 해일 같은 ‘자연적 악’도 포함되는)가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속죄 신학’이 전자(어떻게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갈 수 있는가?)를 다룬 반면, ‘악의 문제’로 불린 후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된 철학 논쟁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부여한 의미와는 별도로 다루어졌다. 이 둘은 철저히 분리되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와만 관련되었다. 성금요일에 시작된 혁명—신학적으로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폭발성이 강한 부활 사건이 그 첫 열매였다—은 한쪽으로 밀려난 것만 같았다.
십자가가 사회적・정치적 악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암묵적 전제를 낳았다. 그런 ‘악’은 (당연히) 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어야 했다.
악을 다루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은 배제한 채 스스로 ‘악을 처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는 연옥이든 미사든 로마가톨릭에서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희생제사에 덧붙이려 했던 것에 저항한 종교개혁가들과 유사하다.)
기독교 신학에서 악을 다루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악을 처리하신다. 그 밖의 ‘악을 다루는’ 행위는 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런 기반에서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제국과 테러리즘이 공존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국제 정치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통해 새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말만 번지르르하거나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회복하고 그와 관련하여 속죄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듯이(이 책의 3부에서 다룰 내용이다), 악에 대한 성경적 분석을 회복하고 십자가를 그 악의 일부가 아니라 전반을 다루는 해결책으로 보아야 한다.

● 잘못된 이유로, 가증스러운 십자가?

신약성경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중요한 일이 벌어졌고 그 결과 세상이 달라졌다고 책마다 주장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의미에 사로잡힐 때 이 변화의 일부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첫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날 혁명이 시작되었다.
사실—많은 사람들이 놀라겠지만—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문제는 신약성경의 관심사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에 중심을 둔 신약성경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사람들은 자주 그것을 무시해 버린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
우리는 하나님을 관대한 창조자요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아니라, 성난 폭군으로 그렸다. 이런 사고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라, 이교도 신앙이나 마찬가지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 벌어진 일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한다.
예수님의 죽음이 무언가—긴급히 필요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았다면, 도덕적 모범이 될 수 없다. ‘모범’의 의미는 우선하는 무언가에 늘 의존해야 한다. 사도 요한의 표현처럼,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우리 죄를 속죄하는 희생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마땅히 같은 방식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4:10-11 요한은 독자들이 서로 죄를 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드리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희생 제물은 이미 드려졌다. 이들은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이를 통해 그분은 유일무이한 무언가, 긴급히 필요한 무언가를 행하셨다—을 닮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그 ‘무언가’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