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옥에 갇힌 것 자체가 복음의 목적을 섬기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도리어 그와 그가 전한 메시지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적 행위를 복음과 일치시키라고 촉구하는데, 이는—바울 자신이 그래왔고 지금도 그리하는 것처럼—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공동체의 통일성과 거룩함은 공동체와 그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생각이 변화되어 메시아 바로 그분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때에 찾아오며, 그럴 때에만 비로소 찾아온다.
예수는 참 인간이요, 궁극의 이스라엘인이며, 주의 종이요, 사람으로 나타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카이사르는 그저 천박한 흉내 내기에 불과함을 알게 해 준 진정한 왕이심.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를 지니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이용해 먹을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받아들이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고는 사람의 모양을 취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그분을 위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늘과
땅 위와 아래에 있는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입이
예수 메시아를 주로 고백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모든 이)의 이야기요, 이스라엘 이야기이며, 한 분 하나님의 이야기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 이스라엘이 예배하던 한 분 하나님이 몸을 갖고 나타나신 분이라는 것, 그 때문에 온 세상의 주로 임명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예수가 주로 높이 올림을 받으시고 모든 이가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은 바로 십자가 때문이다. 십자가로 세상의 모든 권세를 격파하셨다 때문이다.
예수가 온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세력에게 거두신 최종 승리와 그들을 압도하는 예수의 권능을 송축함으로써, 그 자신이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하나님’도 바로 그곳으로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깊이 곱씹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께 속했음을 깨달으면서 바로 이 주제를 기본부터 다시 생각했다. 바울은 메시아가 생각하셨던 것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교회 안에서 온전한 통일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그러지고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순결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법을 일러 주는 비밀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할 일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마음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나는 바울이 이렇게 메시아의 마음을 대단히 탁월하게 표현한 것을 한편으로는 그가 예수께 초점을 맞춰 성경을 깊이 묵상한 결과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가 보여 주신 모범을 본받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도 역시 무거운 고난을 겪으며 겸비해졌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예수가 주로서 높이 올림을 받으신 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했다.
“구주요 주이신 왕 예수”가 하늘에서 오셔서 현재 우리가 가진 몸을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되게” 바꿔 주시리라고 선언한다. 시편 8편이 선언하듯이, 그에겐 “만물을 자신의 권위 아래 정렬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회심자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던 이들은 이교 제의에 참여하여 사람 몸에 칼로 상처를 내려 하는 이들보다 나을 게 없는 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 메시아 종말론messianic eschatology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품어 왔던 소망의 최종 완성이었다. 이는 메시아와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살았던 집이 애초에 그 집을 지었던 건축가에게 넘어갔으며, 그가 중심이 되어 그 집을 다시 짓고 있다는 말을 한다.
메시아를 향한 그의 충성!
메시아 패턴(메시아가 보여 주신 모범)을 따른다. 메시아는 그의 지위(“하나님과 동등함”)를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 쓸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종”의 삶과 수치스러운 죽음에 내주셨다. 그는 바로 그 때문에 지금 만유의 주로 높이 올림을 받으셨다.
바울은 메시아가 누구신지 아는 ‘지식’이 고난 속에서 친밀히 나타난다는 것을 배웠다.
‘사귐’ 혹은 ‘나눔’(공유)을 뜻하는 코이노니아koinōnia
상호 귀속(소유)
우리를 바울이 “죽은 사람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그 길로 가장 가까이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바울은 자신도 메시아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품고 있던 궁극의 소망, 곧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고자 메시아의 죽음에 동참하길 즐겨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이야기는 메시아 안에서 완성되었다.
바울이 메시아를 본받듯이,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을 본받기를 배워야 한다. 모든 이가 그런 삶의 방식에 저항하면서 거룩함을 지키고 하나를 이루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 길은 메시아가 몸소 만드신 길이요, 그가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 낸 길이며, 진짜 사람, 진짜 몸으로 나타나신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그분의 지위가 만들어 낸 길이다.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이 모든 능력을 주신다. 예수 따름이가 가질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오로지 예수의 역사를 통해 임한다.
두려움에 떨던 이 노예 오네시모는 순전한 사랑—세상을 창조해 낸 바로 그 사랑—때문에 노예의 죽음을 당했던 한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 소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바울은 그 소명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 가운데 하나가 화해katallagē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한 분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신다는 것이었고, 유대인과 그리스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진짜 유대인, 진짜 그리스인. 진짜 남자와 여자. 진짜 노예와 주인. 그 모든 이가 하나가 되어야 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실제 행동을 통해 당신 자신을 노예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으로 정의하셨음을 알고 있었다. 출애굽 이야기 자체가 그런 이야기였다. 바울은 궁극의 자유를 믿었다(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자유를 믿으셨다고 믿었다). 피조물 자체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누리는 자유, 결국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부활한 삶(생명)을 의미하는 자유를 믿었다. 늘 그랬듯이, 바울이 안고 있던 과제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이 원대한 시각을 그 본질이 훼손당하여 위태로운 처지에 빠진 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인간이 사는 현실 세계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몸소 메시아로 임재하사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그 하나님이 아주 큰 위험이 따르는 목회 전략을 통해 자신과 친한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는 바울 안에 임재하셨는지도 모른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기가 그들의 사귐koinēnia이 풍성하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여 그들을 모두 ‘왕에게까지’, 메시아에게까지 데려다주길 기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메시아 안에’ 있는 모든 이가 ‘메시아’라는 것이다.
결합을 가리키는(한 몸임을 나타내는) 용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메시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는 화해의 메시지가 하나님이 하셨던 행위를 재현한다.
바울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배우길 원한다. 규칙과 원리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달 외워 흡수하지 말고,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하여 “명확한 이해에서 나오는 모든 풍성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기를 원한다. 이 모든 일은 그 ‘신비’를 드러내신 분이 바로 예수 바로 그분임을 그들이 깨달을 때에 일어날 것이다. 메시아 그분이야말로 그들이 “지혜와 지식의 모든 숨겨진 보화”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신을 통해 만물이 창조되게 하셨던 예수가 이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통해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신다. 바울은 지금 바로 이 예수가 이렇게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세상이 임했음을 되새겨 주며 이 세상을 송축한다. 물론 이 세상은 그와 그의 벗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기를 익혔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를 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 세계는 유대 세계지만, 이전의 유대 세계와 다른 점이 있다. 다윗의 진정한 자손이요 참 인간(진정한 ‘형상’)이신 메시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의미가 알려지게 된 유대 세계다. 이 메시아의 실체와 의미를 미리 알려 주는 이정표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모든 충만”—한 분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이 “그분 안에 기쁘게 머무셨다.” 이것이 성전 언어다. 이 언어는 단순하면서도 아주 심오한 요한의 말—“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과 더불어 사람이 예수에 관하여 가질 수 있는 견해 가운데 가장 높은 견해를 제시한다. 예수는 형상이요, 이 세계라는 성전의 중심에 계신 참 인간이시며, 하늘과 땅에 발을 딛고 서 계신 분이요, 종국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게 하실 분이며, 그의 부끄러운 죽음으로 만물을 그 창조주와 화해시키신 분이다. 골로새 사람들과 자신을 이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모두 이 그림의 일부가 되었으며, 바울 자신이 겪는 고난도 주이신 예수가 당신의 권세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때에 그들은 이날을 돌아보면서, 다시 새로워진 피조물이 어떤 모습일지를 생생히 보여 준 작은 모형이요 청사진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가 진실로 누구인지 깨달으라. 메시아가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며, 너희는 메시아 안에 있다. 따라서 너희도 죽었다가 부활했으니, 이제 그에 맞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금은 감춰져 있으나 새 창조(피조 세계)가 드러나고, 왕이신 메시아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가 오리라. 그 일이 일어나면, 너희가 이미 들어가 있는 그분도 나타나시리라. 이를 믿고 그대로 살라.”
메시아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 줄 모델이 되게 하고 이 목적을 계속 이루어 가고자 구해 내신 새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포이에마(작품)poiēma라 이야기하는데, 영어의 ‘시poem’가 바로 이 말에서 나왔다.
이제 새 성전은 예수 따름이 공동체로 이루어지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으로 거하시는 곳이다.
십자가가 얻은 승리는 이제 십자가를 통해 실행되어야 한다.
제자의 길을 충실히 걸어가려고 애씀은 영의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서명하는 것이다.
복음 자체처럼 하나님의 능력도 오직 인간의 약함을 통해서만 비로소 알려질 수 있음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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