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 여행...
그는 이 모든 사건 경과를 메시아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의미하는 내용의 일부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종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라는 말은 그들이 늘 살아가던 그리스-로마의 이교 신앙이 지배하는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 한 분 하나님이 살아서 활동하시고 완전히 새로운 것, 장차 임할 날에 완성될 무언가를 시작하신 세계를 상상하며 살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새 성전 창조와 관련이 있었다. 교회 곧 고린도 사람들이 앙망하던 지혜를 지닌 지도자를 찾다가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 교회가 바로 새 성전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영으로 들어와 사시게 된 곳이었다. 바울이 생각했던 교회관은 종국에 나타날 성전을 향한 옛 유대인의 소망을 가져왔으며, 예루살렘 성전과 광야의 성막이 그것을 미리 알려 주는 이정표 역할을 했던 새 창조(피조 세계)를 제시했다. 바울은 교회가 그런 곳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사람들이 그런 교회에 속해 있다면—그들이 메시아에 속해 있다면—이런 부질없는 시시한 싸움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를 전하는 어리석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약함이 인간의 강함보다 강하다. 바울의 설교가 일깨워 준 것처럼, 그들이 믿은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이미 메시아 안에서 세워졌으며 마지막에 완성될 것이다.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온 세상을 아우르는 영광스러운 유업이 메시아와 그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리라고 약속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이 만물을 바로잡으시고 인류를 회복시켜 본디 인류가 가졌던 역할과 명예를 되찾아 주시며, 순전한 인간성을 썩게 하고 파괴하는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들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창조 유일신론creational monotheism
메시아의 백성은 죽었다. 이들은 옛 정체를 뒤에 버려두고 새 정체로, 메시아의 사람이라는 정체로 들어갔다.
이제 메시아의 사람이라는 그 정체를 훼손하지 않고도 온갖 부류의 삶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에 그들의 관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관건은 ‘양심’이다. 바울의 양심이 아니라,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다시 우상 숭배로 되돌아갈 수도 있는 다른 누군가의 양심이 문제다.
바울은 이 서신을 쓰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메시아 백성으로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성경이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지으면서, 그 성경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메시아 바로 그분에 비춰 아주 새롭게 해석한다. 종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것을 가르친다.
사랑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사랑이 신자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미래에 속한 실상이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완전한 실상을 보게 미래가 저편에서 기다린다. 중요한 점은 이 미래가 예수와 관련된 사건 그리고 영의 능력을 통해 현재라는 시간 속으로 미리 앞당겨 들어왔다는 것이다. 사랑은 현재의 미덕이지만, 신자는 이 미덕 안에서 다가오는 마지막 시대의 삶을 내다보고 그 삶을 실제로 체험한다. 예수의 부활은 새 세계가 열렸으며, 그 결과 “주 안에서 여러분이 하는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부활은 우리가 살아간 삶과 행한 일이 “헛되지” 않은가를 묻는 하나 마나한 질문에 대한 궁극의 대답이다.
이제 “‘그분이 모든 원수를 자기 발아래 두실 때’까지, 그분이 계속 다스리셔야 합니다.”
어둠의 권세들은 이미 메시아에게 패배했다. 죽음 자체가 격파당하면, 이 승리는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바울은 메시아의 사람으로 존재하게(살아가게) 된다는 것을—예수와 영(성령)에서 절정에 이른 위대한 성경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철두철미하게 변화된 생각과 마음, 변화된 상상과 이해를 가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해야 ‘이미 그러나 아직’인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의미가 있었다.
메시아는 이미 부활하셨다. 메시아의 모든 백성도 메시아가 “왕으로 오실 때”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미래요, 그 미래가 지금 역사하고 있다고.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신세계 안에서 행하는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메시아의 백성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표지이자 이 백성을 하나로 만들어 줄 방법이라고 보았다.
메시아라는 분에 관한 선포 자체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더 큰 그림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 선포는 본질상 살아 계신 신을 알리는 소식으로 가짜 신들이 가득한 세계에 도전하는 유대교의 메시지였다.
바울은 석방된 뒤에 옥고를 치르던 때를 돌아보면서,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는 일이었다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저 깊디깊은 절망에서 우러나온 그의 기도가 성경의 뿌리에서 예수 형체를 담은 표현으로 발전해 가고, 예수 형체를 담은 표현에서 기도다운 형식과 형체를 더 갖춘 간구와 송축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어도,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과 승리를 송축하는 옛 성경의 기도를 떠올려 주면서도 이제는 예수가 주권을 행사하시는 주로서 그 기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을지라도 새삼 놀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더 깊은 곳에서, 곧 예수와 그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 속에서 찾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옥중 서신 넷이 모두 에베소에서 쓴 서신이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체험한 투쟁이 이 서신을 쓰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라고 생각한다. 이 서신들은 예수가 메시아요 세상의 모든 세력을 그 발아래 두신 주권자라는 시각을 표명한다.
나는 바울이 이제는 시詩로 변한 이런 진리 문언들과 성경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그의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며 들으면서, 오랜만에 또 다시 이런 시각을 그 주위에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이런 간구와 기도를 통해 자신이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을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신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승리와 주이신 예수를—송축함
그가 옛날 성경의 시와 패턴을 취하면서도 그 시와 패턴의 중심에 예수가 있음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예수께 초점을 맞춰 기도해 온 습관이 그가 이 절망을 벗어나 소망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데 아주 긴요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야곱처럼 사도도 천사와 씨름하며 컴컴한 밤을 보내고 나면 그 말투는 물론이요 어쩌면 그 몸도 비틀거릴 수 있지만, 그래도 기독론과 치유는 함께하며 서로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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