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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바울 평전-톰 라이트

9장. 고린도I / 2부 왕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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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고린도로...

오래된 유대의 메시지가 이제 이교도들의 마음과 삶을 바꿔 놓은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예수를 통해 일어난 일 곧 우상의 힘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이 승리를 통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세우셨으며, 다시 돌아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오래전에 성경이 약속했던 것, 실은 바울 자신이 아레오바고에서 놀란 재판관들에게 들려주었던 것을 한 분 하나님이 행하시리라는 것, 이 하나님이 온 세상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정리하시리라는 것이었다. 그날 곧 인간의 모든 부패와 사악함이 “진노와 격노”를 마주하고 “괴로움과 고통”을 겪을 그 날에는, 우상을 섬기는 데서 돌이킨 이들이 예수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아주 빨리 성장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이 그렇게 자라기를 원했지만, 사실은 그런 그도 그런 급속한 성장을 믿지 못하겠다 할 정도였다. 복음이 스스로 그런 능력 있는 역사를 이루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머물던 때를 돌아보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지금 고난을 당하는 와중에 오히려 번성함을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 진정 역사하시는 위대한 표지로 본다.

예수 따름이에게는 거룩한 성생활이 선택 사항이 아니라 당연지사다.
절제가 없고 미친 듯이 격정에 사로잡힌 정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을 보여 주는 표지다. 그것은 우상에서 돌이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갖는 의미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전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존재 양식 가운데 일부이기도 하다.

돈도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제자도 가운데 일부였다. 바울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함이 아가페agapē 곧 ‘사랑’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남에게 노상 얻어먹거나 빌붙어 먹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따름이는 “외부인들이 존경할 만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며,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야 한다.

성과 돈은 중요하지만, 이것들을 숭배하면 안 된다. 정결한 성생활과 물질에 인색함이 없음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DNA 안에 들어와 자리 잡아야 했던 것이었다.

파루시아 곧 예수가 ‘왕으로 임재하심’ 혹은 ‘나타나심’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그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았으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 그 완성이 이루어지리라는 메시지의 일부였다.
바울은 하나님 영역(‘하늘’)의 생명과 능력이 인간 영역(‘땅’)의 삶과 현실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풍성한 은유 언어를 갖고 있던 유구한 유대 전승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바울은 비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며, 비유대인과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생각하되 예수가 완전히 바꿔 놓은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진짜 ‘황금 시대’—물론 바울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는 메시아가 죽음을 격파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면서 시작되었다.
소망 가득한 슬픔이라고 말한다. 이런 슬픔은, 비록 여전히 맹렬하고 다급한 상실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다시 하나가 되리라는(재연합하리라는) 소망이 강하고 분명하게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가 종국에는 ‘주와 함께’ 하나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 하늘은 (말하자면) 우리가 존재하는 차원 안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실재다.

주께 속한 이들도 높이 올림을 받아 그 정당함을 확인 받고 주의 보좌에 함께 앉으리라고 말한다.

“살아남아 있는” 이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장차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며, 메시아께 속한 이들이 그 일부가 되리라는 것이다.

즉 메시아께 속한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다. 예수를 믿는 동안 죽은 이들은 예수가 임재하실 때 안전하며, 그가 나타나실 때 부활할 것이다. 그런 다음 이 모든 다른 일 역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 낮의 사람들은 자제하고… 메시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그분과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 따름이들은 일종의 신학 시차증神學時差症, theological jet lag을 안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온 세상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지만, 예수 따름이들은 자신들의 시계를 이 세상과 다른 시간대에 맞춰 놓았다. 이들의 세계관 시계는 이미 낮이다. 그러니 이들은 낮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 나라가 이미 예수로 말미암아 이 세계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며 예수가 다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에 비로소 완성되리라는 것.
사람들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 시대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면, 도래했다는 새 시대와 완성이 남아 있는 새 시대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여러분이 이미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면, 새로운 행동 방식이 이미 존재한다.

“주의 날”—옛 이스라엘이 소망했던 “주의 날”을 예수에게 초점을 맞춰 새롭게 각색한 날—은 현재의 시공간 질서가 끝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의 목적은 종말과 관련하여 무시무시한 억측까지 마다하지 않으려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경향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갖가지 두려움과 풍문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실히 일러 주려는 것이다. 예수가 정녕 다가오는 세계의 통치자이셨으니, 그의 백성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안전했다.

바울은 늘 유대교식 기도문을 사용했지만, 그 기도문 안에 예수를 포함시켰다.

예수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왕이요, 궁극의 고난을 당한 분이며, 참 인간으로서 영광과 영예 가운데 왕관을 받으실 분이다.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 또 한 분이신 주가 계시니"
그가 올린 기도는 출애굽 기도, 하나님나라 기도, 메시아 기도, 예수 기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