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학파는 신들이 당연히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인간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그들만의 세계에 산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그 자신의 힘으로 계속 돌아간다. 그 세계의 원자(원자설은 기원전 5세기에 데모크리토스가 이미 주장했다)는 앞뒤로 움직이면서, 이 길 저 길로 “갑자기 움직여” 서로 충돌하며, 이를 통해 이전과 다른 결과들, 이전보다 진보된 다른 삶의 양식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세계와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적인’(그것을 태어나게 한) 원인이 있으며, 죽을 때는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 흩어지며 인간은 존재하기를 멈춘다. 이런 세계관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소수 의견으로 존속했다. 그러나 그 뒤에 근대 서구 문화에서는 이 의견이 주류 견해가 되었다. 많은 이는 이를 근대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스토아 학파는 본디 범신론자들이다. ‘하나님’과 세계는 많든 적든 동일하며, 신이 부여하는 생명의 불꽃인 로고스logos가 만물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생명은 온 우주가 살아 움직이게 하는 불이나 영으로 구성되며 큰 화재가 일어나는 순간처럼 엄청난 불꽃을 내며 타오른다. 그 뒤에는 마치 불사조처럼 온 세계가 다시 시작되며, 사건들은 이전과 똑같은 경로를 밟아간다. 따라서 현명하고 유덕한 인간의 삶은 세계 내면에 존재하는 로고스를 따라 생각하고 행동함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에픽테토스가 그 좋은 예라 할 많은 스토아주의자는 유연한 범신론을 주장했다. 이 범신론에 따르면, 스토아주의자들 자신이 엄밀히 말하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신성’의 일부이지만, 그래도 이들은 신적 존재에게 공경과 감사를 담은 예배를 올리며 그 신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바울이 하는 말은 무엇보다 한 분 하나님이 철저한 초월자이면서도 친밀한 인격체로서 임재하신 분임을 이야기하는 유대인의 생각이다.
주권자 하나님은 저 위 높이 계시고 이 땅 너머에 계시니, 고로 이 땅에 사는 이들은 메뚜기와 같지만, 하나님은 온유하게도 가까이 오사 당신 품에 양들을 모으시고 어미 양을 인도하신다.
바울은 (예수도 가장 인정하기 힘든 순간에 인정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의 통치 권력들이 장차 그들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한 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목적으로 그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의 믿음에는 한 분 하나님이, 로마 세계가 이교의 온갖 악한 모습을 갖고 있으며 장차 그것 때문에 책임 추궁을 당할 텐데도, 이 세계를 기이하면서도 확실하게 세우셨다고 믿었다. 유대인과 로마인이 그리스 사상가이자 여행자인 바울 안에서 만난다.
충실한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임을 알 수 있었으며, 그러기에 모든 관찰 결과와 토론도 하나님의 세계를 관찰한 결과요 그 세계가 의미하는 것에 관한 토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 사상의 언어와 개념을 철저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그가 프뉴마pneuma를 말할 때 그가 말하려는 ‘영’이 스토아 학파 사람이 생각했을 법한 영과 같으면서도 같지 않음을 알지 않았을까, 혹은 그가 예수를 일컬어 에이콘 떼우eikōn theou라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그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런 사실을 즐기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그는 자신이 말하려는 의미를 사람들이 오해하면, 그 오해를 끝없이 바로잡곤 했다.)
바울이 지금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우리의 훌륭한 신전이 범주의 오류”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이 만유를 지으신 분이다. 모세가 말했듯이(바울은 여기서 모세를 언급하지 않으나, 그가 제시하는 생각은 이스라엘의 성경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이 한 분 하나님이 모든 사람(민족)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그들의 때와 장소를 나누어 주셨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알기를 원하셨다. 무지는 결코 하나님이 뜻하신 계획이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찰할 줄 모르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당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틀린 말을 하고 있다. 그들의 말과 달리, 하나님은 만인과 만물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신성이 아니다. 참 하나님은 만유를 지으신 분이다. 그는 세계와 구별되는 분이지만, 세계와 분리된 분이 아니다(이 점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과 다르다). “참으로 그분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사실상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 나쁜 생각이라는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스토아 학파가 믿었듯이, 모든 곳에 신이 있다면, 우상을 예배 대상으로 삼는다 하여 해가 될 일은 없었다(물론 그런 대중의 생각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생각을 물리치며, 이것이 더 큰 무지라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찾게 하셨다! 아마도 손을 뻗어 그를 찾으면 정말 찾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그가 찾으시는 것은, 그는 그저 반응을 찾으신다. 스토아주의에서는 그런 반응이 보이지 않으며, 에피쿠로스주의는 더더욱 그러하다.
셋째, 스토아 학파의 역사관은 순환론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역사란 순환하는 게 아니라 직선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비문이 인정하는 ‘무지’는 잠시 존재하는 현상이다. 창조주는 그것을 잠시 허용하셨으나, 이제는 그것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으려 하신다. 역사—시간 자체!—는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대화재’나 모든 것이 그저 그 구성 요소인 원자로 용해되어 버리리라 생각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과 사뭇 다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 목적지는 세상을 바로잡는 궁극의 정의가 서는 날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한 사람을 통해 온전하고 온당한 정의로 온 세상에 책임을 추궁하시기로” 날을 정하셨다. 인간의 법정은 최소한의 관심사를 판단한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한 비밀과 의도를 근거로 행하실 마지막 심판이기 때문이다.
참된 지혜는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목적을 모든 민족 앞에 드러내셨음을 깨닫는 데 있다고 암시한다. 이 목적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예수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은 바로 이 예수를 통해 당신이 오래전에 하셨던 약속을 다 이루시고 온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와 다른 이교 문화 속에 존재하는 수수께끼와 모순—실은, 무지—이 어둠의 세계를 가리키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 그리고 참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 속에서 세상을 향한 당신의 궁극적 목적을 드러내셨다면 사람은 이제 바로 이것이 여태까지 모든 이정표가 내내 알려 온 것일 수도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렇다. 이것은 새롭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 마지막 말은 아폴론 자신이 바로 이 법정을 세울 때 했던 말과 분명 정반대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타당하다.
바울이 그들이 모인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다. 바울은 떠났다. 이것이 재판이라면,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난 셈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이 지켜 온 전통을 다른 각도에서 읽어 보면, 그 전통이 내내 지시해 왔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었음을 아테네의 원로들에게 확실히 심어 주었다.
'기독교 서적 > 바울 평전-톰 라이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장. 에베소I / 2부 왕의 사자 (0) | 2020.12.31 |
---|---|
9장. 고린도I / 2부 왕의 사자 (0) | 2020.12.31 |
7장. 유럽으로 / 2부 왕의 사자 (0) | 2020.12.31 |
6장. 안디옥과 예루살렘 / 2부 왕의 사자 (0) | 2020.12.31 |
5장. 키프로스와 갈라디아 / 2부 왕의 사자 (0) | 2020.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