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와 약속/
3. 관련된 성경구절들의 해석/
II. 본론: 신학과 법학의 만남/
바울신학의 새 관점과 정지조건부법률행위:신학과 법학의 만남-김병국/
신앙과 학문 제20권 제4호(2015. 12)
(4) 증거와 약속
히브리서에서는 '증거'와 '약속'을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사용한다. 즉 '증거'는 구원이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렴풋한 기대를 뜻하는 반면, '약속'은 구원이 아주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런데 죽으신 목적은 누군가를 "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누구일까? 첫 언약 때에 죄를 범한 자이므로 당연히 구약시대의 성도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약시대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효력을 미친다. '정지조건부법률행위'의 '정지조건'이 성취됨을 통해 십자가 이전에 하나님을 믿던 자들에게도 동일한 구원이 보장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구원의 보장을 '영원한 기업의 약속'이라고 표현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 이전에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은 '증거'인 반면, 십자가 이후에 주어진 것은 '약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증거와 약속은 단순히 시간적 순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처음에는 불확실한 '증거'를 받았으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취됨을 통해 '약속'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불확실했던 것이 이제는 확실한 것이 된 것이다.
'증거'와 '약속' 사이의 대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히브리서 11장이다. 우선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2절과 39절이다.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2),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히브리서 본문에서 '증거하다'(martyrew)가 암시하는 것은 하나님, 성령, 그리고 성경이 어떤 판단이나 진술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이다. Strathmann 1967: 497].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한 '약속'은 아직 받지 못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아벨(4절), 에녹(5절), 노아(7절), 아브라함(8절) 등의 믿음의 사람들의 예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들이 받았던 '증거'는 구원을 위해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나열하다 말고 13절에서 그 사실을 강조해 준다. 그들은 '약속'을 받은 자들이 아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아벨 등의 구약의 의인들은 다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약속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도 약속은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먼 훗날에 예수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슈니빈트(Schniewind)와 프리드리히(Friedrich)는 히브리서의 '약속' 개념이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 특수성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다. 그는 구약 성도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을 개인적 약속과 궁극적 약속들로 구분하고 전자, 즉 땅에 대한 약속, 번영에 대한 약속 등은 그들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후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최종적 성취는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Schniewind and Friedrich, 1964: 584].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을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확실한 '약속'은 받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약속은 '정지조건'이 성취된 후에야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정지조건'이 성취될 그 날을 멀리서 보며 환영했다.
히브리서 11장 후반부는 이 논리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17절 부터 38절까지 구약의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소개한다. 그리고 39절에서 13절에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위대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만을 받은 자들이다. 아직 약속을 받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온전해지는가?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그들이 온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40).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여기서 우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교회를 말한다. 복음이 없이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그들, 즉 11장에서 나열한 믿음의 조상들은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없다. 그 누구도 '우리가 아니면'(직역은 '우리 없이는'[코리스 헤몬]이다) 즉 예수님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히브리서의 주된 수신자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교회를 떠나려 했다.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도 이 핍박을 피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 옛 조상들의 믿음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 않다 그 조상들은 오직 증거만을 받았을 뿐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야 그들에게 약속이 주어졌다. 옛 조상들의 믿음은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이것을 우리 식대로 표현하자면 '십자가라는 정지조건이 성취되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정지조건이 이루어지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서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결코 완전한 구원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어야 할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와 '약속'의 대조를 통해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