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딜레마의 해결책으로서의 정지조건부법률행위/
II. 본론: 신학과 법학의 만남/
바울신학의 새 관점과 정지조건부법률행위:신학과 법학의 만남-김병국/
신앙과 학문 제20권 제4호(2015. 12)
(1) 정지조건부법률행위
대한민국 민법 "제5절: 조건과 기한, 제147조 [조건성취의 효과] ① 정지조건 있는 법률행위는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 그 효력이 생긴다."
김주수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권리발생(權利發生)의 법률요건(法律要件)이 대체로 존재하지만 사실(事實)의 어떤 것이 발생하지 않고 있을 경우에 종종 법률(法律)은 이에 생성(生成)중의 법률요건에 있는 전단적(前段的), 중간적(中間的) 효과를 주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기대권(期待權) 이라고 한다. 예컨대 조건부법률행위로부터 생기는 권리(제147조, 148조), 상속개시전에 있어서의 유류분권리자의 권리 등이 이에 속한다.[김주수, 1995: 27]
다시 설명을 하자면 쌍방이 계약을 맺으면서 미래에 발생할 어떤 일을 계약 이행의 조건으로 내세운 경우, 그 계약, 즉 법률행위 자체는 그 즉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계약이 규정하고 있는 내용의 실행은 그 미래의 조건이 성취되어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성경에의 적용
'정지조건부법률행위'의 패턴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설명한 후 그것이 우리가 제시했던 신학적 난제들을 어떻게 잘 해결하고 성경의 여러 구절들과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할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구속역사의 전개를 보여준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제시하셨다. "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 [이와 유사한 구절들로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겔 20:11), "13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에게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겔 20:13), "21 그러나 그들의 자손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지켜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따르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더럽힌지라 이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분노를 쏟으며 그들에게 내 진노를 이루리라 하였으나"(겔 20:21), "19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등이 있다. 그리고 구약의 성도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완성된 구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도 완성될 수 있었다면 유대인들을 위하여는 십자가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궁극적 구원을 얻는것은 불가능하다[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만약 유대인들은 이미 궁극적 구원의 방편을 가지고 있었다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행 1:8)에 다니며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런 구절들은 율법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율법의 행위에 집착한 이유일 것이다.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율법을 만족스럽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9) 이하에 등장하는 바울의 탄식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정직한 고뇌를 보여준다.] 모든 율법을 지키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왕하 17:13). Cf.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신 31:12);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7);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23: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의 방편은 오직 율법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은 율법에 집착했던 것이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인간들이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것을 기대하신 것은 아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율법을 지킴을 통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셨다.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셋째,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편으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정지조건'을 마음에 두고 계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인간들에게 제시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언젠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완벽하게 이루시겠다는 것이었다. 훗날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고, 율법이 규정한 희생제사, 속죄제사를 완성하게 되면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율법수여라는 법률행위에 부가된 '정지조건'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지조건부법률행위'와 하나님의 율법수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전자의 경우 '정지조건'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지조건'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율법을 수여하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그렇게 해야 인간들은 율법 자체가 구원의 방편인 것으로 이해할 것이고, 그래야 그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절망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정지조건'을 비밀로 해야 인간의 구원을 원하지 않는 악한 영적 세력(흔히 말하는 사탄)을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넷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정지조건'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던 '비밀'이었다.[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고든 피(Fee)는 고전 4:1에 나타난 '비밀'을 설명하면서 "God's plan of salvation, long hidden to human minds but now revealed in Christ"라고 말한다. Fee, 1987: 160.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실 때 인간의 완전한 순종 이외에 그 어떤 미래의 사건을 계약 성취의 조건으로 암시한 적이 없는데 불쑥 십자가가 그 조건이었다고 제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학자들은 십자가를 이방인 구원과 결부시키는 것은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지만 그것을 유대인들의 구원과 결부시키는 것은 어색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십자가가 구약성경에서 암시적으로라도 계약성취의 조건으로 제시된 적이 없는데 그것을 유대인들의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 어색하다면, 십자가를 이방인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색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을 위한 필요충분한 구원의 방책으로 율법 언약을 세우셨다면, 구원의 범위를 이방인들에게까지 넓히려 하셨을 때 이방인들과도, 유대인들과 맺었던 것과 동일한, 율법 언약을 체결하셨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새로운 종류의 십자가 언약을 만드실 필요는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주신 이유는 기존의 구약의 틀이 필요충분한 구원의 방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영적 존재인 사탄, 마귀도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 만약에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 '정지조건'을 성취하는 것임이 사탄에게 비밀이 아니었다면 사탄은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려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왜 그토록 영악한 사탄이,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께 영광과 승리가 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영원한 패배가 되는 일인데도, 유다와 유대인들을 종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모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사탄이 그렇게 한 이유는 십자가를 통해 '정지조건'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이었음을 사탄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사탄까지도 속여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수여하실 때 십자가라는 '정지조건'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셨던 것이다.
다섯째, 마침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때가 차매'를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렀다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펑(Fung)은 그리스도의 도래 자체가 때가 차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구약중간기 시대에 진행되었던, 복음전파를 위한 여러 준비들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힘들다. Fung, 1988: 183f.]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고, 자신의 몸을 영원한 단번의(once and for all) 속죄제사로 드리셨다.
여섯째, 유일하고 참된 속죄제사인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구약의 모든 제의들과 율법은 십자가를 예표해 주는 모형과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ㄱ)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으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직도 모형과 그림자인 율법을 실체 자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모형으로서의 율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만약 구약의 제사제도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요성 자체를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용서를 선포하시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죄의 용서에는 희생이 필요했고, 그것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모형이요 그림자로서의 구약 제사제도가 필요했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했을 때 그것은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는 장벽의 역할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바울 당시의 율법이 유대인들에 의해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바울은 율법 그 자체를 공격했다. 율법은 모형으로서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실체는 아니었다. 그런데 바울 당시의 많은 이들은 율법 자체가 구원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맹렬히 공격을 한 것이다.
일곱째, 십자가라는 '정지조건'의 성취는 그 이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에게도 그 효력이 소급된다. 즉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력의 소급적용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완전하게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이 되어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루시고, 그 효력을 구약의 성도들에게 적용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드러나는 율법의 역할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십자가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완전하며 흠이 없는 것이다.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둘째, 그러나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율법의 주된 가치는 십자가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십자가 이후에 사람들이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