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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소명-오스 기니스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소명(The Call)- 오스 기니스(Os Gui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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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소명(The  Call)- 오스 기니스(Os Guinness)





"내 길은 공적인 길이며, 내가 일할 곳은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함께 어울려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섭리에 따라 맡겨졌다고 생각했던 그 직책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_[윌리엄 월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영국의 하원의원으로서 노예 매매 폐지와 관습의 개혁 법안을 제출한 복음주의자]


소명이 핵심이다

첫째, 소명은 단순하고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소명(부르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서로 부르고, 하나님을 부르고, 동물을 부르기도 한다. 동물들도 부를 수 있다[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들짐승과 우는(call) 까마귀 새끼에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라고 썼다]. 이 소명이란 단어는 장구한 신학과 역사를 거치면서 이 단순한 의미에서 많이 변모하였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의미와 관계 중심적인 배경이 결코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전화로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그 사람의 귀를 잠시 동안 붙드는 셈이다.

둘째, 구약 성경에서 소명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부른다는 것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만들거나 존재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called)"고 나온다. 이처럼 결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셨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제정하시고 창조하셨던 것이다. 소명이란 현재 우리의 모습 및 행위와 관련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차 우리가 될 모습과도 관련된다. '이름 붙이기-부르기'는 현재의 모습과 장래의 모습을 융합시킨 것이다.

셋째, 소명은 신약 성경에서 더욱 특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것은 구원과 거의 동의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도록 그분께로 부르신다는 의미로 소명(부르심)이 사용된 예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같이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전체는 '부름받은 자들'[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cclesia)의 어원]의 공동체다. 이 같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부르심이 구원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이요, 후에는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될 자들이다. 그러나 부르심이야말로 하나님이 주도하신 이 네 가지 행위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따라서 소명이 종종 구원 자체를 상징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보통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묘사된다.

넷째, 소명은 신약 성경에서 또 다른 중요하고도 확장된 의미를 갖는데, 이는 후대의 교회 역사에서 더욱 꽃을 피우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실 때의 부르심은 그저 가벼운 제안이 아니다. 그분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이요, 그분의 소환은 너무나 강력한 명령이기 때문에 오직 한 가지 반응만이 합당하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분의 권위만큼이나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반응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동시에 다른 일로도 부르시는 것이다. 즉 평화로, 교제로, 영원한 생명으로, 고난으로, 섬김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깊은 차원에는 제자도가 있다. 이는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에서'를 내포하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자연스럽고도 합당한 반응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골 3:23) 할 것이다.

요컨대, 성경에서 소명은 중심적이고 역동적인 주제로서 믿음의 삶 자체를 상징하는 은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부름받은 자'가 되는 것이며, '그 도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이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차적인 소명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살고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정 주부나 법조인으로 혹은 교직으로 부름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이차적인 소명으로서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일 뿐 일차적인 소명은 아니다. 그것들은 여러 '소명들'(callings)이지 절대적인 그 '소명'(The calling)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이자 하나님의 소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이차적인 소명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인 소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일차적인 소명과 이차적 소명 사이의 중요한 구별은 두 가지 도전을 던진다. 먼저는 두 소명을 함께 붙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둘이 올바른 순서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우리가 소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첫째 것이 첫째 자리를 지키도록, 즉 일차적인 소명이 이차적인 소명 앞에 오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차적인 소명이 이차적인 소명으로 반드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가톨릭적 왜곡

소명의 총체적인 성격이 왜곡되어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이 되었다. 이런 왜곡을 '가톨릭적 왜곡'이라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가톨릭 시대에 발생했고 지금도 가톨릭 전통의 주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신교인들이 잘난 체할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적 왜곡에 굴복해 버렸다. 오늘날 개신교에서 통용되는 전임 기독교 사역이란 용어가 그 대표적이다.

만약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이 믿음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진다면 모든 이원론적인 구별은 무너진다. 소명이란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일차적인) 부르심에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이차적인)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의 회복은 교회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모든 피조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으신 곳은 단 한 치도 없다."_ 아브라함 카이퍼.


■ 묵상 질문

당신은 삶 전체를 통합시켜 주는 중심점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는가?

당신의 고상한 생각, 헌신적인 노력, 깊은 감정, 모든 능력과 자원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탱시켜 줄 소명 의식을 발견하고 싶은가? 나사렛 예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