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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소명-오스 기니스

6. 당신에게 걸맞은 일을 하라/소명(The Call)- 오스 기니스(Os Gui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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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신에게 걸맞은 일을 하라

/소명(The Call)- 오스 기니스(Os Guinness)


당신이 가진 것 중에 그저 받지 않은 것이  있는가?

보통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에 부합하게 우리를 부르시는데, 재능의 목적은 청지기직과 섬김이지 이기심이 아니다.

소명 의식은 직업 선택에 선행해야 하고, 소명을 발견하는 길은 우리 각자가 창조될 때 부여받은 재능을 분별하는 것이다. 

소명은 "당신의 존재는 당신이 하는 일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존재에 걸맞는 일을 하라"고 말한다.

재능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따르면 재능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신중하게 관리할 책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능은 항상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애서도 좀 더 넓은 사회 속에서든 마찬가지이며, 특히 궁핍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의 재능에 맞는 자리를 찾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한 자리에 맞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재능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리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본연의 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존 코튼(John Cotton)[17세기의 저명한 목사요 뉴잉글랜드 회중교회 체제의 창설자]은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첫 번째,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소명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공공선(善)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가 그 일에 재능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자신의 소명 간의 핵심적인 연결 고리를 붙잡아야 한다. 아울러 이 주제에 관한 훌륭한 기독교 서적들과 테스트 방법들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에 걸맞는 소명을 성취하는 데는 기쁨이 따르고, 이 소명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앞서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의 운명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셨는가, 우리를 어느 곳으로 가도록 부르고 계시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있다.

우리는 자신이 독특하게 설계된 방식, 곧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한다.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

하나님은 우리가 '본연의 자아가 되도록' 부르시고 '우리의 존재를 행하도록'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를 때에만 진정 '본연의 모습'이 되고 '우리 존재를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인 재능은 이기심이 아니라 섬김, 곧 완전한 자유다.

모든 논의에서 부르심(calling)소명(vocation)은 동의어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는 앵글로- 색슨어에 뿌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을 뿐이다. '소명'과 '부르심'의 의미를 달리 사용하는 자들을 경계하라. 만약 '소명'을 '부르심'과 구별시켜 성직자를 언급하는 데 사용한다면 이는 분명 가톨릭적 왜곡을 의미한다. 반면에 '소명'을 '부르심'과 구별해 고용이나 직업을 언급하는 데 사용한다면 이는 개신교적 왜곡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첫째, 우리는 개별적인(혹은 특정한) 소명공동체적(혹은 일반적) 소명을 구별해야 한다.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직은 양자를 모두 존중한다. 개별적인 소명이란 우리 각자가 독특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께 삶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별적인 소명이 독특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공동체적 소명이란 우리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모든제자는 거룩한 자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받았다. 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미덕이다.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이 중요한 이유는 소명이 지나친 개인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소명은 공동체적소명을 보완해야지 그것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는 성경에 나온 예처럼 공동체적 소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자신의 개별적인 소명을 앞세워 교회의 공동체적 소명을 거부하는 자는  자기 기만에 빠진 것이다. 

둘째, 우리는 후발적인 특별한  소명 본래적인 평범한 소명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도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직은 양자를 모두 존중한다. 특별한 소명이란, 하나님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며 초자연적인 교통을 통해 개개인에게 주신 과업과 사명을 지칭한다. 다른 한편, 평범한 소명이란 "나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일차적인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자가 지니게 되는 인생의 목적과 과업에 대한 인식을 뜻한다. 이것은 이차적인 소명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 구체적. 초자연적 의사 소통이 없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얼마나 '자본주의식'으로 우리의 책임을 감당하는가 하는 점에 평범한 소명이 잘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자 중 소명을 받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다. 우리가 모두 후발적인 특별한 소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본래적인 소명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소명을 모두 갖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셔서 유급직(有給職)으로 부르시거나 종교적인 전문가가 되게하신 예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소명이란 개념 자체가 본래적인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본래적인 소명을 망각했거나 저버렸을 때 그들을 비판하고 도전하기 위해 특별히 부름받은 사람이다. 이와 같은 선지자적 비판은 종종 강한 분노를 수반했지만, 그 공격을 받는 대상이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선지자적 비판의 목적은 회복에 있지 해산에 있지 않았다. 선지자적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이탈한 본래적 소명으로 되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소명이었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서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도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지만 청지기직은 양자를 존중한다. 소명은 부분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다. 우리는 소명이 다차원적이며 우리의 여러 관계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명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가진 재능의 진수는 이 땅의 삶 가운데 성취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연스럽고도 충만하게 우리의 존재를 드러냈을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 발휘되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타락하여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제 일은 부분적으로 창조적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저주받은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소명에 완벽하게 들어맞은 일을 발견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축복이다.

넷째, 우리는 소명의 명료성신비성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도 이기심은 전자에 치우치고 청지기직은 양자를 존중한다. 


■ 묵상 질문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은사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여 썩히고 싶은가? 아니면 그것을 이웃의 필요와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 지어 그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원하는가? 나사렛 예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