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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3_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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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과학은 사물에 관한 것, 신학은 말에 관한 것이다.

_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를 공적 영역에 다시 도입할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려면 세속적 이원론의 발생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뿌리로부터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발전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오늘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합한 효과적인 복음 전도 전략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삐 풀린 이성


신앙과 이성은 각기 별개의 범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철저한 이분법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세속주의로 귀결될 수 있었다. 만일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성만으로 알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계시가 왜 필요한가 묻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합리주의(rationalism)가 태동되었는데, 그것은 "이성"(Reason)을 신적 계시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의 창고로 받드는 이념이었다. 사실, 이런 자율적 진리들을 사용해 종교의 주장을 판단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세력 균형에 변화가 생겼다. 종교가 오류의 잣대 역할을 하는 대신, 이제는 이성이 진리의 잣대로 격상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잣대로 재어 보니 종교가 수준에 못 미친다고 많은 이들이 결론지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접어들 무렵(대략 1300년대에 시작되는데), 이성을 계시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자는 북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점차 높아져서 (1700년대에 시작되는) 계몽주의 시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계몽주의의 신조는 자율성(autonomy) 이었다. 외적인 권위는 모조리 뒤엎고, 오직 이성으로만 진리를 발견하라! 계몽주의는 과학의 눈부신 성공에 매료되어 과학을 참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왕좌에 올렸다. 또한 하층부를 상층부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이 유일한 실재이며 과학적 이성(scientific reason)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쳤다.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환상이라고 선언했다. 이성이 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인 양 선전되었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유물론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두 가지 피해


낭만주의는 유물론적 철학을 배격하고 관념론적 철학을 선호했다. 이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 또는 영을 궁극적 실재로 보며, 그것은 흔히 정신(Mind), 영(Spirit), 또는 절대(the Absolute)로 표기된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치명적인 양보를 하게 되었다. 자연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기계론적 과학에 양보하고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만 대등한 영역을 확보하려고 애쓴 것이다. 그 결과, 낭만주의적 관념론은 상층부에 국한되고 하층부에서는 과학적 유물론이 계속 지배함으로써 이원론적 구조가 그대로 남게 되었다.

크게 개관해 본다면, 그 후 계몽주의와 그 지적 후예들에게 하층부를 지배하는 관할권이 주어졌다. 그곳은 합리적.객관적.과학적 지식을 다루는 영역으로 공적 영역이라 불린다. 낭만주의와 그 후예들에게는 상층부를 관할하는 권한이 주어졌는데, 거기는 종교.도덕.인문학을 다루는 사적 영역이다.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적 형태의 이원론


낭만주의

종교와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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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과학과 이성


데카르트의 분할


물질과 정신 사이의 뚜렷한 이분법.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을 그처럼 뚜렷하게 대비시킨 목적이 정신의 영역을 방어하기 위함이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도 본래 종교적 단언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즉 사고란 정신적 활동이므로 인간 정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아니러니는,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이 줄곧 그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인간의 정신(영)에 대한 그의 변호가 아니라 그의 기계론적 우주관이었다.


데카르트의 세속적 이원론의 유산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정신

영.사고.감정.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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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기계론적.결정론적 기계


상층부와 하층부 간의 "무서운 단절"은 뉴턴의 물리학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후에 더욱 넓어졌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

자연은 탁상시계의 톱니바퀴만큼이나 엄격하게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같은 메커니즘에 어떻게 인간의 영혼이나 영이 들어설 여지가 있을까? 이런 개념들이 종교와 도덕에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과학 개념의 세계에는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16세기 종교전쟁으로 인해 하나됨에 이르는 길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안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확신으로 실증주의(positivism)와 과학적 유물론 같은 철학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들은 과학에 지식(하층부)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한 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사적인 신념과 문화적 전통(상층부)에 불과한 것으로 돌렸다.



칸트의 모순


태양계의 기원에 관한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설명(성운설)을 정립.


칸트가 개조한 진리에 관한 두 영역 이론


자유

자율적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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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뉴턴의 기계적 우주


상층부에 자유 또는 자율성을 배치. 여기서 자율성(autonomy)을, 문자 그대로 자신이 스스로 부과한 법칙에만 종속되는 것으로 정의했다.(헬라어에서, 'authos'는 자아, 'nomos'는 법을 의미한다.)  그의 이상은 오직 자신의 도덕적 의지의 영향만 받는 것이었다.

"보편적 [도덕]법의 창조는 전통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역할로 여겨졌는데, 이 기능이 이제는 인간 개개인의 이성적 의지로 부당하게 넘어간 것이다." 심지어 "칸트가 이성을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칸트는 순전히 개념적인 이 세계에 하나님과 영혼과 불멸성을 배치시켰다.

하층부는 우리가 인식하는 영역이고, 상층부는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결국 칸트는 두 손을 들고 과학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 것 "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적으로 완성된 무신론자들


칸트의 이분법을 달리 묘사하면, 하층부는 공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의 영역이 된 반면, 상층부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치의 영역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용어가 사회과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오늘날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용어는 사실 대 가치다


가치

사회적으로 구성된 의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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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리


사실가치의 분리는 19세기 말 다윈주의의 발생으로 확고하게 고정되었다. 다윈이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개연성 있는 자연주의적 메커니즘을 제공함으로써 자연주의를 완전하고 포괄적인 철학으로 만들어 주었다. "다윈은 지적으로 완성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층부가 이제 이음새가 없는 완비된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상층부는 역사.과학.이성. 등의 분야와 전혀 연결되지 않고 완전히 단절되었다. 만일 진화의 원동력이 인간의 정신을 만들어 냈다면, 종교와 도덕 같은 것들은 더 이상 초월적 진리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정신이 어느 수준까지 진화하면 나타나는 생각, 곧 인간 주관성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우리 나름의 도덕과 의미를 강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것들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양식이란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자연주의적 원인에 의해 서서히 나타나는 것으로, 생존의 방편으로 필요한 기간만큼만 존속할 뿐이다.


세속적 신앙의 도약


포스트모더니즘의 딜레마를 요약하면, 윤리학은 유물론적 과학이 비실재적(unreal) 이라고 선언한 어떤  것의 실재(reality)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기계인 동시에 지각을 가진 자유로운 행위자인데, 논의의 목적에 따라 정해질 따름이다."


핑커의 두 영역론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윤리학 경기

인간에게는 도덕적 자유와 존엄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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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경기

인간의 자료 처리용 기계다


핑커가 전문가로서의 삶을 지도하는 철학에 기초해서 개인적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재 인간들은 기계론적 패러다임에 의거해 행동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래서 그 역시 자유와 존엄성 같은 것의 실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 자신의 철학 안에는 그런 것들에 대한 토대가 없지만 말이다.


세속적 "신앙의 도약"


포스트모던적 "신비"

도덕적.인도주의적 이상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규정하는 진리 내에 기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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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적 자연주의

인간은 기계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심각한 지적 상실이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인지할 수 없고 검증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상층부에다가 존엄성과 의미를 향한 모든 희망을 매달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관 전쟁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인간의 자유와 같은 내용들을 도무지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유물론적 철학에 기초해서 이런 개념을 거짓으로 "알고"(know)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상층부가 거짓이지만 필요한 환상의 영역으로 축소된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 상층부로 도약해야 한다는 뜻인데, 거기서는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들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극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자유와 존엄성, 의미와 중요한 의의(Significance)-이 그저 유용한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희망 사항으로, 비합리적 신비로 말이다.


당신의 세계관은 너무 작다


계몽주의 이래, 사실의 영역은 계속해서 가치의 영역 속으로 그 영토를 확장한 끝에 후자에게는 남은 영토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하층부가 도덕과 의미 같은 모든 전통적 개념을 분해하면서 상층부를 "잠식한다"

이처럼 분열된 지식관을 수용한 사람들을 전도할 때는, 이같이 들쭉날쭉하게 갈라진 틈이 그들의 사고 체계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무서운 실재를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그들이 신앙의 도약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하층부에서 수용한 과학적 자연주의가 적절한 세계관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을 누구나 경험하는 그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경험하는 그런 인간 본성 말이다.

누구든 세계관이 너무 "작을" 경우에는 인간 본성의 어떤 요소가 항상 그 패러다임에 맞지 않기 마련이다.

세계관의 목적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떤 세계관이 세계의 일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세계관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가리켜 기계에 불과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의 삶 전체가 그것을 부인한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모순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이 믿는다고 말하는 내용과, 그의 삶 전체가 그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 사이의 모순이다. 그때 복음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위한 든든한 기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인격적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인격성도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이야말로 최고의 인간 이상을 지지하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상층부에 배치시키지 않고 삶과 실재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포괄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으로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저 종교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인 것이다.


제국주의적 "사실"


상층부를 묘사할 때 칸트식의 표현-마치 ....인 것처럼(as if)-은 사실 죽은 양보다. 그것은 유용하지만 따지고 보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사실의 영역이 강력한 제국주의로 성장하여 가치의 영역을 급격하게 식민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결과 자아와 도덕적 책임 같은 전통적 개념들을 편리한 허구로 축소시켜 버린 것이다.


캠퍼스에서의 전쟁


"옳고 그른 것은 개인의 가치관과 문화적 다양성의 차이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사실의 영역이 제국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고 있고 가치 영역이 반격을 가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및 다문화주의와 손잡고 합리성과 객관성의 개념을 파헤쳐 그 정체를 폭로하는 급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페미니즘이다.

하층부가 점점 더 자연주의적이고 기계론적 성향을 띨수록, 상층부는 더욱 비합리적이고 공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논리와 합리성으로부터의 도피는 의미를 더 크게 경험하기 위한 탈출구로 받아들여졌다.


자유주의의 찌꺼기


진리에 대한 이층적 관점으로의 전환은 자유주의 신학의 발흥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의 인식론(진리에 관한 이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결정적인 결함은 진리에 대한 이층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층부에서는 과학과 역사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수용하는 한편, 신학은 상층부로 넘겨져 개인적이고 비인지적인 경험으로 축소돼 버렸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은 오류투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연주의적 과학과 역사는 기적을 비롯한 초자연적 사건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연주의에 순응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 요소들을 부인하거나 그것들을 자연주의적 언어로 번역하는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층부에 자연주의를 수용하고 나서 상층부에만 국한된, 자연이나 역사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재건하려고 애쓴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남은 신학은 너무나 얄팍해서 결국 다른 곳- 실존주의(신정통파), 마르크스주의(해방신학), 페미니즘(여성해방 신학), 과정사상(과정신학),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등-에서 해석의 틀을 빌려오게 된다. 그럴 경우 기독교적 범주들은 외적인 개념의 틀에 입각해서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핵심적 특징은 성경에 대한 세세한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 영역론에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기독교를 그 뿌리로부터 떼어 내어 상층부에 던져 버린 셈이다. 거기서 기독교는 주관적이고 알맹이 없는 상징과 은유로 전락하고 만다. 실제적으로는, 보다 내실 있는 다른 사고체계를 위한 영적인 창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부활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심오하고 광범위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 둘이 따로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 영적인 의미를 함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통 그리스도인은 통일된 진리의 장을 붙들고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또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복음전도


포스트모던시대를 사는 우리가 전도활동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 진리의 전체적 통일성(holistic unity)이 우리 메시지의 핵심을 차지해야 한다. 전통적인 변증론은 많은 이들에게 더 이상 효과가 없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종교가 객관적으로 사실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유익한 기능을 발휘하는지가 중요하다.

사실, 현대인은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영성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종교는 제도.교단.공식적 교리.형식적 의례 등과 같은 공적 영역을 지칭하게 된 반면, 영성 개인의 체험이라는 사적 영역을 연상시킨다. 이제는 신아으이 영역까지 이처럼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으로 나뉜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그리고 영성이 개인적 체험의 사적 영역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기에, 많은 이들이 공적인 종교기관과 공식적인 종교의 교리라는 개념 자체에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모호한 영성은 건전하다고 보는 반면 교리적이고 권위적인 종교는 위험하다고 보는 합의가 더욱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_테리 매팅리(Terry Mattingly). 영성의 개념은, 교리적 내용이 빠진 채 분석 가능한 어떤 역사적 주장들로부터도 동떨어진 체험을 의미하기에 이르렀다. 즉 상층부에만 속하는 그 무엇을 지칭한다는 말이다.


이 시대의 영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기독교를 상층부에만 국한되지 않는, 통일되고 포괄적인 진리로 제시하는 일이다. 먼저 기독교가 모든 차원에서 진리임을 확신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합리적.역사적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영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는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을 대적하도록 부름받았는데, 그 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직면한 도전은 이전 세대의 것과 같지 않다. 이 세상의 영을 대적하려면 오늘날 그 영이 취하는 형태를 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대적하지 못할 뿐더러 무의식중에 그것에 동화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실재에 관한 것이지 주관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확실히 밝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가치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사적인 선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근대적 의미의 사실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이라는 용어는 어떤 종교적 틀로부터도 자유로운 "가치중립적" 과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제공하는 것은 세속세계에서 말하는 이층적 진리 개념과 완전히 대조되는 하나로 통일되고 통합된 진리(unified, integrated truth)다.


C. S. 루이스의 참 신화


형이상학적 "상실"

우리는 분리된 진리의 개념을 다만 학문적인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우리는 결정론적 우주에 몸담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들이 절실히 믿고 싶어하는 것(우리의 삶은 목적과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 사이의 내적인 분열도 낳기 때문이다.


이성대 낭만주의에 관한 C. S. 루이스의 논의


낭만주의

아름답지만 상상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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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냉혹하지만 실재하는 것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이 된 신화였다. 그것은 신화에 담긴 경이와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 초월적 영역과 접촉하고픈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경이 중의 경이로서, 시공간의 역사 가운데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신화이며 또한 사실이다. 죽는 신에 관한 오랜 신화가 신화로 그치지 않고 전설과 상상의 하늘에서 역사의 땅으로 내려온다.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발생하여 설명 가능한 역사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발데르와 오시리스를 지나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역사적 인물에 이른다"_C. S. 루이스


그는 기독교가 경험적 증거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들에 기초해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 사건들이 가장 고상한 영적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기에는 서로 상충되고 반대되는 진리의 분열이 없었다. 따라서 한 개인의 내면 생활에도 분열현상이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의 이성과 영적 갈망을 둘 다 채워준다. 이는 참으로 좋은 소식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동시에 아름다움과 의미를 향한 우리의 속 깊은 굶주림을 채워주는, 하나로 통일된 진리다.


온전한 진리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는 우리 자신을 세상의 잘못된 사고방식, 곧 잘못된 세계관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현 시점에서 가장 지배적인 잘못된 세계관을 파악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가장 만연한 사고방식은 진리에 관한 두 영역론이다. 성과 속, 공과 사, 사실과 가치 사이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 세계관만이 온전하고 통합된 진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세상에 증명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실재의 제한된 한면이 아니라 총체적 실재에 관한 진리다. 즉 총체적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