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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2_ 다시 찾은 기쁨/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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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영혼을 얻는 것뿐 아니라 지성도 구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얻고도 세계의 지성을 잃어버린다면,

세계를 얻지 못했음을 당신은 곧 알게 되리라.

_찰스 말릭(Charles Malik)


기쁨과 목적을 되찾는 길은 바로 기독교를 총체적 진리로 새롭게 이해하는 데 있었다.

각 분야에서 현재 지배적인 견해는 저변에 깔린 철학, 곧 무엇이 궁극적으로 옳고 타당한지에 대한 기본적 가정(假定)으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자기 나름의 가정을 그 분야에 내놓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실리의 비결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이분법들-성/속, 공/사-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실로 개인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공적 영역이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으로 차단될 때, 우리 삶은 찢어지고 파편화되기 마련이다. 일과 공적인 삶은 영적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우리 삶에 가장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영적 진리들은 일과 외의 시간에만 적합한 여가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복음은 제한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며들어" 끼쳐야할 영향력을 빼앗기게 된다.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단일한 틀 속에 통합하는 세계관적 관점을 발견해야만 한다. 뿐 만 아니라 정직한 일과 창조적 활동 모두가 주님께로부터 온 타당한 소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일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성경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런 통찰력은 우리에게 새로운 목적의식을 채워 줄 것이며,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서 오는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국회의사당에서의 죄책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예배로 하나님께 바칠 때에만, 그분의 능력이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을 가로질러 흐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문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섬기기도 한다. 교회가 제자도를 진지하게 여긴다면, 신자들이 일요일에 교회문을 나선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그 방법을 가르쳐야 마땅하다.

교회는 준비된 평신도들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도록 그들을 내보내는 훈련장에 다름 아니다.


이중 언어 구사하기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법을, 곧 복음의 관점을 우리 문화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옛 나라의 관습과 말을 얼마간 보존하면서 사는 이민자와 같이 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언어를 우리 주변의 언어로 활발하게 번역하는 선교사와 같이 살도록 부름받았다.


믿음의 간격


"세속화가 종교의 죽음을 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종교를 다른 많은 영역과 더불어 현대적 삶을 이루는 한 영역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는 이전에 주장하던 보편성과 해석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_신학자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기독교는 사적 영역에서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 영역에서 믿을 만한 주장을 내놓거나 현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값을 치르고서 얻은 것이다.

복음을 사적 영역에서 해방시켜 모든 실재에 관한 진리로, 그 영광스러운 모습 그대로 제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각난 헌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대한 섬김으로 또는 문화 명령(땅을 정복하라는 성경의 명령)의 성취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앞서 우리의 신앙을 일.사업.정치 등의 영역에 적용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기독교 정신분열 현상


플라톤이 중요한 이유


플라톤의 이원론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형상

영원한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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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료

영원한 무(無)형상의 흐름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이원론의 문제는 혼돈과 악의 근원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물질이라는 것이다. 창조세계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우월하고 선한) 영적 부분과 (열등하고 악한) 물질적 부분이 그것이다. 이는 성경적 세계관과 분명히 대치되는 것이다. 성경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질은 하나님의 능력을 저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독자적 속성을 지닌 선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그것은 그분의 절대적 통제권 아래 있다. 이것이 무로부터의 창조교리가 지닌 실질적 의미였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성을 갖고 있지 않을 뿐더러,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왔으며 그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성경은 물질세계를 본래 선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그분의 선한 성품을 반영한다. 성경은 악을 물질이나 창조물의 어떤 부분과도 동일시하지 않고 죄와 동일시하는데, 죄는 본래 선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뒤틀리게 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성경은 몸을 본래부터 죄많은 것이나 가치가 덜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육신의 정욕"을 피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할 때 그가 언급하는 것은 몸(body)이 아니라 "육신"(flesh)으로, 이것은 죄악된 본성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다.


"나는 육체(혹은 육신, flesh)를 대다수의 경우.....................그것은 당신의 신체부위를 가리키지 않는다.(바울은 몸 자체를 악하게 여기지 않는다.) 육체란, 자아가 공허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기 손아귀에 있는 자원으로 채우려고 애쓰는 자아를 지칭한다. 육체는 하나님의 자비 이외의 다른 것으로 나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나'를 일컫는다"_존파이퍼 


만일 몸이 본래 죄악된 것이라면 성육신은 불가능했을 터인데,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주장 가운데 헬라 사상가들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인간, 곧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이성적 탐구는 더 이상 감각의 세계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역사를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과 같이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들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성경은 인간의 딜레마를 도덕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헬라인은 인간의 딜레마를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했다.

이 경우 문제는 우리가 신체적.물질적 존재라는 점이다. 만일 물질 세계가 나쁘다면, 종교적 삶의 목표는 삶의 물질적 측면을 피하고 억누르고 궁극적으로 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된다. 

많은 교부들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플라톤주의의 이중적 창조 개념을 각색한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먼저 지적인 이해가 가능한 플라톤식의 형상을 만들었고 나 중에 그 형상들을 본떠서 물질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조세계에 대한 이 같은 이원론적 견해는 자연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원론적 견해를 낳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금욕주의 윤리를 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물질적 세계와 신체적 기능이 본래부터 열등하고 죄의 원인이 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재발견한 것은 기독교 자체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그것이 철학 뿐 아니라 윤리학.미학.과학.정치학 등 여러 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이방적 체계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극단적인 이층적 이분법, 즉 상층부와 하층부를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는 이른바 이중진리론(double-truth theory)을 호소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영원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가 창조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이 둘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되었다.

"두 가지 진리가 존재한다. 초 자연적 세계의 진리와 초 자연적 세계와 상충되는 자연적 세계의 진리가 그것이다. 우리가 자연주의자로 있을 동안에는 기독교가 온통 난센스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할 때에는 기독교가 난센스임에도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G. K 체스터튼

물론 이중진리론 자체가 난센스였는데, 이를 반대한 인물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화"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는데, 명백히 비성경적인 것은 배격하고 나머지는 기독교와 양립 가능한 방식으로 재해석하려고 시도했다(이전의 사상가들이 플라톤에 대해서 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은 서구 제국이 몰락한 이래 처음으로 유럽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지적인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그저 초연하고 개관적인 철학적 탐구를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무엇보다도 당시의 절박한 지적 상황에 대처하려했던 변증가다 .......그는 변증의 핵심 전략이 바로 반대자에게 가능한 최대로 양보하고 나서 자기의 논증을 상대방의 가설에 기초하여 개진하는 일임을 인식했던 최초의 변증가였다. ........이런 토마스의 전략을 그의 시대 이래 모든 지혜로운 기독교 변증가들이 채택해 왔다."(J. V. Langmead Casserly)

그 최종 결과는, 용어는 바뀌었으나 헬라철학의 이원론적 틀을 그대로 견지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상층부에다 은총(grace)을 얹고 하층부에는 자연(nature)을 두었다. 여기서 자연이란 근대과학적 의미의 자연이 아니라 아리텔레스적 의미의 "사물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사물의 이상 혹은 완전한 형상, 충만한 잠재력,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인 '텔로스'(telos)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모든 자연적 과정은 신학적이며 하나의 목적이나 목표를 지향하는 이른바 목적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퀴나스와 관련해 혁신적인 점은 그가 "자연"을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각색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 사상에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과정을 선하다고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그 과정을 수단으로 해서 사물이 자신의 "본성"을 성취하고 자기의 이상이나 완전한 형상에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 논점을 포착해 물질세계(질료)를 본래부터 열등한 것으로 보는 플라톤의 사상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았다. 창조물(자연)이 선한 창조주의 작품이기 때문에 선한 것으로 주장했다. 한 역사적인 저술은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메시지를 "하나님이 선하시고, 그분의 창조가 선하다. [그리고] 창조세계의 선함과 인과율은 하나님이 선하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아퀴나스는 중세에 그토록 유행한, 세계를 부정하는 금욕주의에 타격을 가했고 창조세계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견해를 회복시켰다. 이는 예술의 영역에 즉각적인 영향을 발휘했는데, 자연적이고 실재적인 양식을 고무시켰던 것이다. 또한 자연에 관한 연구도 촉진시켜서 장차 일어날 과학혁명의 기반을 닦게 했다.


은혜의 솜털

하지만 아퀴나스는 이층적 구조를 그대로 견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이룩한 좋은 것을 상당 부분 손상시키고 말았다. 아퀴나스가 빌려온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속에는, 그 체계 자체를 폭발시킬 다이너마이트가 숨겨져 있었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 이유는 사물의 "본성"-사물의 목표나 목적 또는 목적론-을 세계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고, 세계 자체가 순전히 독자적으로 자원을 동원하여 그 목적이나 완전한 잠재력에 도달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했다. 이것은 특히 인간과 관련해 곤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과연 우리 삶의 목적은 이 세계의 지평에 의해 제한 되는가?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높은 목적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지닌 자연적 기능만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참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하지 않은가?

성경의 대답은, 물론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퀴나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이 성경적 진리가 들어설 여지를 마련했는가? 그의 해결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을 보존하되 그것을 하층부에 국한시킨 것이다. 상층부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총을 덧붙였다. 그것은 우리의 자연적 기능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부여한 초자연적 선물이나 기능이다. 은총은 바로 '덧붙여진 선물'인 것이다.


아퀴나스의 개조된 이층론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은혜

초자연적으로 덧붙여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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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내장된 이상 또는 목표


그러나 이같은 자연과 은총의 이층구조는 불안정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아퀴나스 이후 이 두 가지 존재 질서는 갈수록 서로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자라는 경향을 보였다. 그 이유는? 서로 간에 진정한 상호작용이나 상호의존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분한 상태를 유지했고 은혜는 그저 외적으로 덧붙여진 것에 불과했다.

이처럼 철저한 이분법의 문제점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 자체를 반반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연/은총의 이원론은 실제적으로 중세의 이층적 영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평신도는 단지 자연적인 지상의 목표- 이는 확실히 열등한 것이다-만 달성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 데 비해, 오직 종교적 엘리트만이 주로 종교의식과 의례의 집행으로 규정된 영적 완전에 도달할 역량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종교 전문가들이 영적 의무를 스스로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진 자들의 몫을 떠맡게 된 것이다. 보통 사람을 대신해 기도하고, 미사에 참석하고, 순례길을 가고, 자선행위를 한 것이다.


반항의 기치를 든 종교개혁자들 

종교개혁자들을 움직인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중세적 이원론을 극복하고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삶과 지식의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적 계시가 모든 학문 분야를 조명하는 빛으로 작용하는, 하나로 통일된 지식의 장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은총의 이원론에 함축된 영적 엘리트주의를 단호히 배격했다. 종교 전문가와 평신도를 대비시키는 이층구조를 무너뜨리고 만인 제사장직이라는 확고한 가르침으로 대치했다(벧전 2:9). 또한 수도원주의를 배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정과 일과 같은 창조질서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 속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중세에는 소명(vocation)이라는 단어가 종교적 직업(사제.수도사.수녀)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으나, 마르틴 루터는 의도적으로 그 단어를 상인.농부.뜨개질하는 사람.주부 등에게 적용했다. 그는 사업이나 집안을 운영하는 일이 사제나 수녀가 되는 것보다 조금도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그 모든 일은 창조세계를 유지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신학적으로 지지해준 것은, 은혜를 자연에 '덧붙여진 어떤 것'으로 본 기존의 정의를 배격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격하시키는 모든 형태의 이원론을 없애고자 애썼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했다. 은혜란 인간의 본성에 덧붙여진 어떤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을 자비롭게 영접한 것을 일컫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이 그들을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구속하고 회복시키게 된다고 했다.

종교개혁자들의 마음은 경건하지만 평가절하되던 평신도들을 향했고, 문화 명령에 순종하여 수행된 일상생활의 여러 활동에 여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세상에서 나오라는 수두원적 소명을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성경적 소명과 대비시켰다.

칼뱅은 "신자 개인에게 세상에서-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걸쳐-하나님을 섬길 소명이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일상적인 일에 새로운 존엄성과 의미를 부여했다." 칼뱅은 그리스도가 문화를 포함한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의 구속자라는 것과, 우리는 일상적인 일을 통해 그분을 섬긴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연/은총의 이원론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력한 반대는 오랜 사고방식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그 새로운 신학적 통찰을 표현할 만한 정교한 철학적 어휘(philosophical vocabulary)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추종자들에게 철학적 공격에 대비하여 그 통찰들을 변호할 도구를 제공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이원론적 스콜라철학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창출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루터와 칼뱅의 후계자들은 뒤로 후퇴해 개신교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기초한 스콜라철학을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원론적 사고가 계속해서 기독교 전통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원론으로부터의 탈출


이런 성/속의 이원론 문제는 오래전에 플라톤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것이다. 즉 죄를 창조세계의 일부(춤.영화.담배.화장)와 동일시한다. 영성은 그런 부분을 피하는 한편 창조세계의 다른 부분(교회.기독교.학교.성경공부 그룹)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으로 규정한다. 결국 목회자나 선교사처럼 영적 영역에서 일하는 것이 은행가나 사업가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창조.타락.구속의 우주적 범위를 새롭게 깨달음으로서 이원로적 사고를 극복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 삶이 치유되고 더욱 온전해지는 것이 가능하다.


창조_온 우주에 찍힌 하나님의 지문

아원론이 탄생한 배경은, 헬라인들이 질료는 선재하는 영원한 것이며 형상에 의해 부관된 이성적 질서를 저항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이원론에 대한 자명한 해답은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선재하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성경적 교리다. 그분만이 모든 창조물의 유일한 근원이고, 모든 부분이 그 본래 창조된 형태에서 그분의 지문과 산한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창조세계의 어떤 부분 본래 악하거나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창조 세계의 특정한 부분-영화.카드.춤.화장-을 따로 격리시키고 그것을 피하는 것으로 영성을 정의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하지만, 하난미의 작품인 이 세계를 향해서는 깊은 사랑을 품어야 마땅하다. 이 세계의 죄와 깨어진 모습을 꿰뚫어 창조시의 본래적 선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창조성의 놀라움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정받아야 한다.

플라톤은 우주 질서를 추상적 이상(질료는 이성적 형상에 의해 질서를 갖게 된다)에 근거해서 설명한데 비해, 칼뱅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법, 또는 창조명령의 산물로 설명했다. 신적인 말씀은 인간의 삶(도덕법)과 물리적 우주(자연법칙)을 모두 다스리면서 사물에게 고유한 "본성"과 정체성을 각각 부여한다. 현대인은 도덕과 과학을 전혀 다른 범주에 넣는 경향이 있지만, 칼뱅에게는 둘다 하나님의 법의 표본이었다. 그 차이는, 인간은 도덕법에 순종하기로 선택해야 하는 반면 자연 산물은 그런 선택의 여지 없이 물리 또는 전자기법칙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뿐이다. 우리가 칼뱅주의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법이 우주의 모든 요소를 다시리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이 우주의 질서정연한 구조를 제정하는 장면, 하나님의 진리가 모든 분야에서 발견되는 현상 등을 포착할 수 있다.


타락_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  

우리는 타락의 우주적 범위 또한 주장해야 한다. 자연세계도 인간의 죄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받았으므로 인간의 죄 또한 자연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파급효과를 낳았다.

헬라사상과 맞서서 우리는, 악과 무질서는 물질세계에 내재돼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난미의 선한 창조를 악한 목적을 위해 왜곡하는 장본인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다만 죄인들이 하난미에 대한 반역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때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창조세계의 한 부분과 다른 부분 사이에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자체를 가로질러 흐른다. 이는 창조물을 선이나 악을 위해 사용하려는 우리의 성향을 말한다. 삶의 각영역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본래 세상을 창조하신 방식과 그것이 죄로 인해 변형되고 손상된 모습을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혁 주의 사상가들은 이것을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이라고 부른다. 구조란 세계의 창조된 성격을 일컫는데,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선한 것으로 남아 있다. 방향이란 우리가 이 구조들을 하나님 또는 우상을 섬기도록 "지휘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우리가 관여하는 각 분야에 대해 첫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구조는 무엇인가? 둘때, 그것이 죄된 목적을 위해 어떻게 왜곡되고 방향이 비뚤어졌는가?

종교활동마저도 죄를 지향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적인 죄는 정확히 포착하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 자신이 성/속의 이원론에 눈이 멀어 영적 영역을 창조계의 "선한" 부분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종교지도자로 하여금 쉽게 자신의 잘못을 "사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혹은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식으로 그럴 듯하게 얼버무리게 만든다. 

"선과 악을 나누는 경계는 국가와 국가, 계급과 계급, 정당과 정당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마음 중심을 가로지르는 것이다."-알렉산더 솔제니친 


구속_ 거대한 분열 이후

마지막으로, 장차 모든 것이 구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완전히 성화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인 물질세계는 최후의 구속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영원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문화 명령을 이룰 것인데, 다만 죄가 없는 가운데 그러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새 창조의 원재료로 아름답고 유익한 것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당한 직업은 각각 새 하늘과 새 땅에 그 짝(counterpart)이 있으므로, 이 땅에서 우리 일이 영원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적 활동에 참여할 뿐 아니라, 종말에 새 땅을 경작할 때 맡게 될 그 과업을 예시하는 셈이다. 일찍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창조세계의 아름다움과 선을 개발하는 일에 함께할 것을 명령하심으로 인간의 삶 전체를 향한 당신의 목적을 계시하셨다. 우리는 새로워진 세상에서 구속된 백성의 기쁜 마음으로 그 과업을 다시 담당하게 될 것이다.

창조/타락/구속의 포괄적 비전에는 성/속의 분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악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목적을 위해 창조물을 오용하는 데 내재한다(구조대 방향). 바울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에 대한 섬김을 지향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일컫는다. 이를 뒤집어 보면, 구속 안에서는 "만물이 다 너희[우리] 것"임을 의미한다(고전 3:21).


균형 잃은 기독교


성경은 타락이 아니라 창조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이땅에서 그분의 대변인으로 부름받았다는 높은 소명에 뿌리박고 있다. 사실 인간이 그처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가 그만큼 비극적인 것이다. 인간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에 죄의 파괴성이 그 같은 끔찍한 절망과 슬픔을 낳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낮은 관점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지배적인 세속적 관점보다 훨씬 높은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의 메시지는 성경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엄성과 높은 소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죄인 이상의 존재

창조가 아닌 죄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마치 책을 중간부터 읽으려는 것과 같다. 그러면 등장인물은 알 수 었고 줄거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성경의 문맥을 벗어난 채 이런저런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그 맥락을 이해할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 대신 타락에서 시작하면 구속을 설명할 방도가 없게 된다. 구속의 목표란 바로 우리를 창조 당시의 본래 지위로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시 우리에게 부여한 높은 존엄성을 회복시켜서,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을 되찾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손

사실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 잘못이고 회개해야 마땅하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로 구성된 비종교적 그리스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할 때 창조에 기초한 하나의 논점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죄와 회개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이교적 그리스 문화를 상대로 할 때 그는 먼저 창조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성경에 무지한 아테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유대적인 창조주의 개념을 확신시켜야 했다. ....그 맥락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비 전도"(pre-evangelism)를 시행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제시하기 전에 변증론을 사용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그분에게 빚진 것이 무엇인지 등의 기본 개념을 변호하는 것을 뜻한다.


토기 항아리 

성경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는 죄가 완전히 정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우리는 이 중간기의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측면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죄와 사탄을 정복할 최후 승리 사이에 속한 중간기다. 우리의 소명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 삶과 세상에 적용하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에 완전한 결말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이편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요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본래 선하게 창조된 것을 인식하고(창조), 계속되는 죄와 깨어진 상태에 대항해 싸우며(타락), 창조세계가 치유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회복되도록 일하는 것(구속) 사이의 균형이다.


더 높은 영성?

구속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라고 요청하신다. 우리가 본래 창조될 때 의도하신 목적을 이루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다. 그분이 창세기에서 "심히 좋았다"라고 선언하신 바로 그 창조 당시의 본성이 완성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인간을 향해 품은 의도를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온전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유효하다.


거대한 드라마

우리의 존재 전체가 죄와 구속의 거대한 드라마에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타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영적으로 중립적인 이성에 의해 인식되는 독립된 영역도 없다. 사실 이성을 중립적인 것으로, 어떤 철학적 혹은 종교적 신념으로부터도 독립된 것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사고의 체계는 모종의 기본적 전제, 곧 자존하거나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궁극적 원리와 더불어 시작한다. 이성은 이런 출발점이 되는 전제로부터 사고하는 인간의 역량에 불과하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이란 말을 사용할 때  인간이 절망적일 정도로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적인 부문을 포함한  인간 본성의 모든 측면이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측면이 구속받아야 하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이 스콜라 철학에 대한 대안철학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추종자들이 동일한 중세의 자연/은총의 이원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 자연/은총의 이원론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 말씀이 지닌 변혁의 능력을 접하도록 열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이제는 통합된 삶이다


참된 성경적 신학은 창조. 타락. 구속의 세 가지 원리를 균형 있게 견지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우리 삶에서 성/속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창조.타락.구속은 창조된 모든 실재의 본성을 형성하는 거대한 사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 범위는 우주적이다.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그분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표현으로 드릴 수 있다.

우리가 기독교 세계 내에서 오랜 성/속의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애쓰다 보면 세속적 세계에 존재하는 강력한 이원론과도 충돌하게 될 것이다. 이는 성경의 메시지를 사적 영역으로 몰아내려는 시도다. 서구의 세속적 사상은 우리가 살펴본 지적인 역사와 같은 흐름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은총의 이원론이 세속화됨으로써, 우리  시대에까지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가치의 이분법을 낳았다. 문화적 포로 상태에 놓인 기독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세속적 이원론도 진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