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은 어디까지나 일요일,
나머지 평일과는 동떨어진 날,
규칙 또한 전혀 다른 날.
분리된 두 세계가 합쳐진 날이 있을까?
_ 존 베케트(John Beckett)
"내가 기독교는 진리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이 총체적 실재에 대한 진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진리라는 뜻인데, 기독교는 일련의 진리들일 뿐 아니라 절대 진리(Truth)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진리라는 말이다."(프란시스 쉐퍼 「기독교 선언」생명의 말씀사)
분열된 지성
기독교적 지성이 없다는 말은, 신자들이 전문성 면에서는 고도의 교육을 받았을지 모르나 자기 분야의 중심 주제를 해석할 만한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고하는 존재로서,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세속주의에 굴복해 세속적 지성이 만든 준거 틀과 세속적 판단을 반영하는 일련의 평가기준을 받아들였다."_ 블래마이어즈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것"(thinking Christianly)은 기독교가 실재 전체에 관한 진리를 제공한다는 것, 곧 모든 주제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mind)을 품는 훈련 중 하나는 창조세계의 설교를 "듣는" 영적 민감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학교 중퇴자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각 지체는 전체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받았고, 그 은사들이 억눌리면 우리 모두가 실패하게 되는 법이다.
미묘한 유혹
"고등교육에 몸담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신앙을 구분하고 싶은 미묘하면서도 강한 유혹을 받는다."
계몽주의의 우상
"이성"이란 적나라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전의 모든 가정과 종교적 신념의 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에서 온 것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이야말로 그런 초월적 힘이며, 정확무오한 지식을 제공한다고 과신했던 것이다. 결국 이성은 절대적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우상에 다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단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정확 무오하고 자율적인 진리의 근원으로 보는 합리주의의 기틀을 정립한 장본인이다.
두 개의 도시
하나님의 도시와 인간의 도시
우리가 어떤 자료들을 처리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채택한 이론적 틀에 비추어 세계를 이해하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존재
믿음은 인간의 보편적 작용이므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가진 반면 세속주의자는 자신의 신념의 기반을 순전히 사실과 이성에 두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세속주의 자체도 기독교만큼이나 궁극적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창조물의 일부-보통 물질이나 자연-가 신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바른 질문은 어떤 관점이 종교적이고 또 어떤 관점이 순전히 합리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안일한 자세로 세속이라는 영역을 불신자에게 넘겨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배적인 지적 우상들을 밝혀내어 비판하고 성경에 기초한 대안들을 정립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도구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으로 그 학문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적으로 다른 철학적 접근을 받아들이게 될 위험이 있다. 세계를 해석하는 일련의 사상은 용어와 개념들로 채워진 철학적 도구상자와 같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나름의 분석 도구를 개발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어떤 이슈가 생길 때 다른 사람의 도구를 빌려 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할 경우, "도구 하나만 따로 빌려 오는 게 아니라, 각 문제에 대한 그들 나름의 특수한 편견으로 채색된 철학적 도구상자 전체를 빌려 오는 것"임을 모른다고 오스 기니스는 썼다.
"마치 다른 사람의 안경을 끼건 다른 이의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같다. 결국 도구들이 사용자의 모습을 좌우하는 것이다."
성경적 도구상자
무엇보다 영적 문제뿐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시 111:10, 잠언 1:7, 9:10, 15:33)
그리스도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다(골 2:3)
"대다수 사람들이 이 본문이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종교적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 구절들은 아주 과격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어떤 경위로든 모든 지식이 종교적 진리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어떤 체계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내세우면 그것이 무엇이든 본질상 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교적 헌신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원칙으로 작용하게 된다. 어떤 종류의 "신"에 대한 경외는 모든 지식체계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일단 우리가 첫째 원리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게 되면, 모든 진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는 하나님이고, 다른 모든 것은 그 기원과 존재의 지속 면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그분의 뜻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역사에서 주요 전환점을 이루는 창조.타락.구속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도 없다.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셔다"
하나님의 창조말씀이 우리가 자연과학에서 공부하는, 물리적 성격을 지닌 법칙의 근원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법칙이기도 하다.도덕(윤리학), 정의(정치학), 창조적 활동(경제학), 미학(예술), 그리고 심지어 명료한 사고(논리학)의 원리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시편 119:91은 "만물이 주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적인 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락
창조의 보편적 성격은 타락의 보편성으로 이어진다. 성경은 창조세계의 모든 부분-우리의 지성을 포함해-이 창조주에 대한 거대한 반역과 연관되었다고 말한다.
타락의 "인지적"(noetic) 영향(지성에 미친 영향)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중생의 은혜와 상관없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무력화시킨다.
죄는 문자 그대로 지각을 "어둡게" 한다(엡 4:18).
불신자가 이룩한 전반적인 사고체계는 성경적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다른 궁극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릇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각 분야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은 비판적 성격과 건설적 성격을 둘 다 지닐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속 학문의 연구 결과를 빌어올 때 그것이 마치 완전히 개방적이고 객관적 사고에 의해 발견된, 영적으로 중립적인 영토인 것처럼 간주하면서 빌어올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타락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자세다.
구속
그분은 인격 전체를 구속하신다. 회심은 우리의 생각.감정.의지.습관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구속될 때 만물이 새롭게 된다(고후 5:17).
그러므로 성경은 죄를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여기며, 부도덕한 행위는 이차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첫째 계명은 어디까지나 첫째 계명이며, 나머지는 우리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예배할지 확실히 한 후에 따라오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구속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정신적 우상들을 던져 버리고 참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일컫는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분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속될 때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 전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재조정되고, 그분의 계시된 진리 위에 다시 세워진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방향을 읽으라
구속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을 향해 구원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우리가 본래 창조될 때 주어진 과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첫째 구절은 사회적 세계를 개발하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가정.교회.학교.도시.정부.법 등이 포함된다.
"땅을 정복하라"는 둘째 구절은 자연세계를 대상으로 일하라는 뜻으로, 곡식을 재배하고 다리를 건설하고 컴퓨터를 설계하고 음악을 잦곡하는 등의 활동을 일컫는다. 이 대목은 문화 명령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의 본래 목적이자 고상한 소명이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그분에게 받은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창조세계 속에 심어 놓으신 힘과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율적인 최상의 지배자가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들의 지배권은 위임된 권세다. 그들은 최상의 지배자를 대변하는 존재로서,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거룩하고 자애로운 보살핌을 반영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길은 바로 창조적인 존재가 되고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다.
타락은 우리의 본래 소명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의 일은 슬픔과 고된 수고를 특징으로 한다.
성인의 두 가지 중심 과제-차세대를 양육하는 일과 생계를 유지하는 일-가 모두 타락하고 파편화된 이 세계에서 고통으로 가득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주하는 모든 노력이 죄와 이기심으로 뒤틀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 우리는 죄책감과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완전한 인간성을 회복하게 되어 다시금 본래의 창조 목적인 그 과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일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적 목적에 동참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분께 우리의 은사를 드린다.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을 섬기는 기쁨으로 맡겨진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의 이상적 존재 상태는 영구적인 여가나 끊임없는 휴가-기도와 묵상을 위해 수도원으로 피정 가는 것까지 포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위해 창조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문화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일꾼으로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성화)과 소명의 영역(문화적 갱신) 모두에서 은혜에 힘입어 일생에 걸친 성장의 과정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이 창조세계와 연속성을 지닐 것이다.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읽지 못한 위대한 이야기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각 장은 앞 장보다 더 나은 이야기일 것이다."_C. S. Lewis의「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맨 마지막 부분_
성장하도록 주어진 삶
일단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중요한 과업은, 성장하고 성숙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삶에서 필요한 첫 단계지만, 줄곧 구원받는 법에만 메시지의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필수사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성숙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끌고, 문화 명령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대리하는 일꾼으로서 그분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인간이란 수단을 통해 보이지 않게 창조세계를 보살피는 방식이라는 뜻으로 마르틴 루터는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의 "가면"이라고 즐겨 말했다. 불신자도 하나님의 "가면" 곧 그분의 섭리적 사랑과 보살핌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가면"이라는 은유는, 직업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어떤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직업은, 우리가 하나님 일에 참여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구원의 일뿐 아니라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에 관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깊은 진리를 깨닫는 것은 승리주의적(triumphalistic) 태도를 갖지 않도록 예방하는 데도 유용하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한 대가로 상당한 값을 지불해야 할 경우가 있다.우리가 옳은 것을 위해 불의에 대항할 경우, 경력이나 공적.전문가적 인정, 수입에서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마침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할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승리주의와 자만과 자기 의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영향권 내에서 상당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성공, 권력, 대중의 환호를 갈망하는 욕구를 "십자가를 못박을" 때에야 그것이 가능하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예수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다면, 먼저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고난의 본을 기꺼이 좇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과정이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싸움임을 예상하고 각오해야 한다. 먼저 내적으로 우리의 사고생활 속에 자리잡은 우상들을 뿌리째 뽑아내야 하며, 외적으로는 타락한 불신세계의 적대감과 부딪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난이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지는 통로임을 인식해야 한다.
개인적 여정
세계관은 누구나 씨름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핵심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궁극적 진리는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 될 만한 것이 존재하는가?
불신 선언서
스위스 농부 같은 인물
하나님의 승리
세계관이 하나의 추상적.학문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누구나 붙들고 씨름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삶의 목적과 의미와 진리를 향한 마음의 탄원-이 있으며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우리가 애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목적의식과 방형감각, 곧 자신의 생애가 우주적 이야기의 일부로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의식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았고,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이 그분과의 관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천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우리의 모든 힘-실질적.지적.정서적.예술적-을 그분께 드린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걷는 모든 길에 빛이 되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놓이도록 근본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창조세계를 개발하게 된다.
잔소리꾼과 부랑배
인간의 문화가 낳은 위대한 업적-예술이나 과학기술이나 경제적 생산력이나-을 대할 때 우리가 보일 첫 반응은, 문화가 하나님의 창조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찬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분석할 때도 사랑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사랑안에서,창조적으로
나쁜 세계관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좋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해야 한다.
"창조성은 영성의 자연스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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