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8. 다 죄 아래에 있다고_현실, 예수도 당하신 억울함 / 1부 그러면 어떠하냐(1:1-3:20)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본문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9-20)





탄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의 현실

그래서 “세상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관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질문에 당도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것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때우지 마라, 정의를 시행하라, 그리고 이웃 앞에 공의를 행하라고 합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을 상징한다면, 공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 당연히 나타나는 열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가 맺히는 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되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너희에게 이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데, 성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인격이 없는 무서운 이상

율법은 성경이 말하고 싶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다 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격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격에게 관계를 정상화하자고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인격으로 대접하시고 우리와 자신을 묶으러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의와 의지는 담아내지 못합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쩔쩔매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여기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지적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공법이 시행되거나 정의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양보나 자족 같은 명분을 내세우며 이것저것 해 보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는 꿈쩍하지도 않습니다. 비참한 인간의 현실은 그런 것들로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그 정도 수준에서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감수하며 각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여러분의 인생에 답을 찾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무시무시한 현실을 왜 연장하고 계시는지를 그리고 예수의 오심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는 말은 근거도 이유도 없는 그냥 뜬금없는 말에 불과해집니다.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가라. 고맙다. 그런데 네가 가서 말해도 그들이 못 알아들을 것이다. 그래도 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이와 같습니다. 그가 누구신지 우리는 몰랐습니다.
예수가 그렇게 오십니다. 못 알아보게 오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믿는 우리도 모릅니다. 우리가 왜 믿는지 우리도 모르죠. 안 믿을 수는 없는데 믿어도 모르는 바로 그것,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해하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가 거기에 교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나는 너희를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다, 나는 이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고 이해도 못하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데려가려는 자리는 그런 식으로는 갈 수 없는 자리다, 너희가 소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리에 가기 위해서 나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 힘으로 어디까지 밖에 올 수 없는지 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라는 것이죠. 이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답답한 현실을 살라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도망갈 수 없게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더 큰 것을 만드신다니 내가 여기에 옵니다. 내가 주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하는 고백에 이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매섭게 몰아붙이십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첫째 계명을 깨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첫 번째 것이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하면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안 하면 용서를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 본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억울해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해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면 억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하실 일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타협하시지 않으셨고 우리가 모를 때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는 비참하고 오해받는 삶을 사셨고 고통과 수모 속에 죽어 이제까지 인류 역사에 왜곡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이 기독교를 욕하고 예수를 비난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얼마나 기가 막힌 방법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현실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현실과 같습니다. 세상에서의 왜곡과 감추어짐과 억울함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답을 얻어야 합니다. 어떤 제도나 명분에 여러분을 떠넘겨서 쉽게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각각이 위대해져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각각이 하나님과 그 사랑을 나눠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가치와 명예를 각자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전 인격과 전 생애로 그분의 영광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여기에 좀 더 이어 붙이겠습니다. “그것은 너희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명예이며 책임이다”. 아멘입니다.



기도

기쁨과 자랑을 주사 우리의 인생을 이 세상에서 예수님같이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영광과 기적이 일어나는 우리의 생애인 줄 아는 믿음으로 말없이 자기 자리를 살아가는 기쁨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일하셨던 그 반전과 그 은혜와 그 기적과 그 영광을 만드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