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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다시보는 로마서-박영선 목사

6.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_선민, 신앙의 실체를 보이는가? / 1부 그러면 어떠하냐(1: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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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17-29)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인간


한 사람의 실체는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아는 것을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는 것이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실체이므로, 모르는 것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모두 실체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아는 것을 행해야만 드디어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유대인에게 있는 선민이라는 지위, 그들이 가진 율법과 할례가 신앙의 실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율법을 행하여 자신의 실체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징계받은 이유

나를 모르는 세상 나라들이 내 백성을 늘 괴롭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해서 쫓겨 갔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종일 모욕을 당합니다. ‘내 이름이 모욕을 당하니 내가 참고 있겠느냐’라고 하시며 구원을 말씀하시는 이 내용 속에는 ‘너희가 왜 쫓겨 갔고, 하나님인 내가 왜 이런 모욕을 받는가를 생각해 보라’가 같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모든 일에서 실패하자, 이스라엘을 세워 찬송 받으시고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은 깨집니다. 죄를 자초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가만두실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그들에게 벌과 심판이 임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고 있으며 또한 율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지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고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이 앎을 실체화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지식이 있어도 이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것은 본인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주위에는 허세를 부리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은, 이 앎을 실체화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에 부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은혜를 입고도 그러한 일에 자신을 드리지 않았고, 선택받은 자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는 불성실한 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사건을 비롯한 여러 힘든 일들을 거치며 막막한 세월을 지내야 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성도들의 인생이 막막해 보이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싸움에서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말을 자기 삶으로 담아내는 일에서 그르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네 실체냐, 아는 것이 너 자신이냐, 그것을 믿으면 너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 라는 물음입니다.
너희가 실제로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주장, 소유, 지식은 너희 자신의 실체일 수 없다, 또한 실체가 되지 않은 이상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각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 이 말씀에 다 떨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지해서 못 믿었다고 칩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먼저 알았으며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몰라서 못해도 심판을 받고,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알고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내가 몰라서 못했지만 만일 알았더라면 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공격입니다. 모르고 못한 것과 알고 못한 것은 둘 다 ‘못했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무시무시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이 여러분을 무엇으로 만들었으며, 무엇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실체로 오신 예수처럼

성경은 네가 인내하느냐, 사랑을 행하느냐, 온유하게 살고 있느냐, 겸손히 행하느냐를 묻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이 가지는 실제적 내용입니다.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실체가 되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우리를 향한 구원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이 구원은 인간으로 찾아오시는 성육신으로 나타납니다. 더 이상 실제적일 수 없죠. 어떻게 이 이상 더 구체적이겠습니까. 같은 인간으로 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더 분명한 실체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는 구체적 인간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을 사시고 우시고 고통스러워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가 준 말씀, 네가 믿었다는 내용을 갖고서 살고 죽고 부활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쉬운 것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과 죽음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은혜에 대하여 나 자신이 구체적으로 빛이 되어야 합니다. 횃불을 들어 비추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빛이 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실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과 약속과 구원과 새 생명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내지 않으면, 누구도 여러분을 보면서도 빛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을 갖고만 있지 말고 말씀을 살아내야 합니다. 내용이 의로워야 합니다.

지금 이 싸움은 실천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의 유무’가 아니라 ‘실체의 의무’입니다. 단지 믿는다고 자랑하고 고함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실체가 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움켜잡으시는 은혜에 대한 반응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무엇이 벌이었습니까? 상실된 마음대로 버려두는 것이 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이러면 안 된다’라고 꾸짖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마라’는 복입니다. ‘여기를 넘어가지 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쳐 주신 울타리입니다. 하나님의 움켜잡음이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고 선을 긋고 울타리를 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울타리 안에 있지 않고 단지 울타리를 외우고 주장하고 고함지르고 있습니다.
심판과 경고는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중립지대에 서서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중립지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선택을 미루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루고 있는 동안은 울타리 밖에 있으며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붙잡으러 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고, 엎드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겠습니다. 저를 울타리 밖에 서 있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타인을 공격하고 무슨 구호를 외쳐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체적 삶에서, 매일의 현실 속에서, 도전하는 세상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아멘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상,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것은 굴복도 아니고 구속도 아니고 손해도 아닙니다. 거기서만 생명과 진리가 나오고 의미와 가치와 자랑과 기쁨이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어찌 생명의 우물가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부름 받은 백성이요, 영광된 인생인 줄 알게 하옵소서. 주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은혜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충성과 인내도 배우게 하옵소서. 누리게 하옵소서.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