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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박영선의 욥기 설교-박영선 목사

02 고난_하나님의 일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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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 2:1-13)

고달픈 인생

“난 이해가 안 돼”라는 말은 자기가 모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내 뜻대로 강제하는 데에 이 말을 많이 씁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붙드시는 하나님


사탄이 하는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은 없고 오로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은데, 그 틈을 사탄이 비집고 들어옵니다. 사탄은 무조건 하나님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심을 기울인 존재들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내는 것이 사탄의 유일한 삶의 보람이며 삶의 이유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일이 있다면,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탄의 시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욥기는 사탄의 떼어 냄과 하나님의 붙드심의 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떼어 내는 싸움은 2장에서 끝나고 3장부터는 전부 붙드는 싸움입니다. 욥의 한탄으로부터 시작해서 친구들의 충고, 답변, 논쟁, 끝없는 불평, 억울함, 호소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욥을 붙드는 행위입니다.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은, 생명을 주신 이가 그 책임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표현입니다. 사탄이 와서 욥을 흔들 수는 있지만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다는 선언입니다.

사탄은 2장까지 나오고 포기하는데, 하나님은 42장까지 끌고 가서 기어코 이길 때까지 안 놓으십니다. 다만 그 사이에서 인간이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결단코 놓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경의 어떤 약속보다도 우선하는, 성경에서 제일 강조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목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

욥에게 이런 고난과 고통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특별한 가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근처에 못 가도록 막지 않으시고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다만 금지 명령을 내리셨을 뿐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독립된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그 독립된 인격성 속에 자유라는 선택권을 가집니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면서도 본인이 무엇이든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입니다.
“너희가 저걸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니까 하나님이 못 먹게 하신 거야.” 사탄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너희에게 충분하신 분이 아니다. 너희에게 충분할 만큼 선하신 분이 아니다. 너희에게 뭔가를 주지 않고 유보해 놓으셨다. 절반만 허락하신 것에 불과하다’라고 해서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금령을 주셨을까요? 인간이 가진 이 선택권은 인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금령 아래에 놓아두시면서 다른 안전장치를 만들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굉장히 놀랍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인간에게 준 독특한 권리입니다.

그런데 이 권리가 권위 아래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명령 아래에 있는 권리입니다. 이 권리로 그 위에 놓인 권위를 깨자 어떤 결과를 보았습니까?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호막이 해제되자 자신이 연약한 존재,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걷어 버리면, 벌거벗은 채로 강렬한 태양 앞에 서거나 또는 얼어 죽을 추위 앞에 선 것같이 벌거벗은 자가 된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우리의 권리를 억압하는 데 쓰지 않으시고 그의 권위, 곧 그의 울타리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순종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이를 위해 인간이 자신의 권리로 하나님의 권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위험, 모험, 시험, 확인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혹은 하나님의 울타리는 사탄에 의해 제거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보호 아래에서 행복해하고 안심하는 정도로는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겠답니다. 그러니 각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시고 독특한 지위를 허락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길을 열어 놓으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창조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다만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존재가 고유의 가치와 고유의 영광을 가지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선택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기꺼이 자신을 바치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자유가 무한하듯이 하나님은 그것을 항복시킬 더 큰 울타리, 더 깊은 울타리를 두르고 더 오래 걸리는 창조의 일을 계속 하시겠다는 것이 욥기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십니다. 예수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연장입니다. 피조물을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 속에 주인공인 인간의 반역을 받아들이시고,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 타락을 회복시켜 부활 생명으로 이끄셔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창조를 완성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보내신 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십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이 내내 욥과 함께 일하십니다. 그를 설득하십니다. 그가 마음껏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고 억울해하고 분하게 여기고 고함지르는 것을 다 받으십니다. 여러 답변을 제시하는 속에서 그가 길을 찾도록 인도하시고 함께하여 그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창조의 하나님

욥이 흠 없이 했다는 것이 욥기의 전제 조건입니다. 욥에게는 벌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전제하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창조 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인간의 대단한 지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인간이 중요한 손님같이 초대되어 주인이신 하나님 옆에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구경도 하게 됩니다.

욥기의 중요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 장관, 이 아름다움, 이 경이로움이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보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내가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인 이상 너희가 한 것에 대한 보상 정도가 아니라, 단지 나의 기쁨과 의로움과 성실함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하는 복들이다. 이 창조 세계에 그 증거가 얼마든지 넘쳐 난다.” 이것이 욥기의 답입니다. 이 답으로 만족하셔야 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선택권으로 하나님의 권위 아래 기꺼이 순종을 약속하며 찬송과 항복을 바치게 하는 것을 목적하고 계십니다.
인자와 긍휼로 말미암는 관입니다. 우리가 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입니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시 103:9)라는 구절이 중요합니다. 잘못했을 때마다 경책하시면 우리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가 아니라, 매일 쥐어 터질 것입니다. 자주 경책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숨 쉴 틈이 있다는 말입니다.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03:9).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시 103:10)십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알아낸 정의는 인과율의 보응 정도입니다. 잘하면 상 받고 못하면 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의 동의를 구하십니다.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시기 위하여 긴 과정을 돌아가십니다. 우리의 불평과 저항과 방황과 분냄과 짐짓 거절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따라오십니다. 따라오신다는 것은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당신에게 항복시키기 위해 긴 길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하나님, 항복을 받아 내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많은 기회와 자유를 허락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옆에 있는데, 욥이 그것을 몰라보고 무슨 짓을 하는가를 볼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고 우리 생각으로 잣대를 삼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받아 내는 귀한 열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에 이를 것입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만 해도 좋으니 볼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참지 못하십니다. “난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려는 하나님인 줄 알아라. ‘이것으로 좋사오니 그냥 여기에 앉혀 주십시오’를 나는 못 봐준다.”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를 향한 사랑과 열정을 기억하십시오.

기도

우리에게 한숨과 불평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인과율에 묶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의 항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두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를 봅니다. 그 안으로 부름받았으니 우리 인생을 간섭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 앞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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