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경우는 그 출발점이 확실하다. 그의 출발점은 늘 예수였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놀랍게 이루신 분이요, 참 사람이며, 참된 ‘형상’이셨다. 그는 몸을 갖고 나타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따라서 유대교 유일신론을 저버리지 않고도,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 안에서 예수를 주로 예배하며 주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예배하며 주라 불렀지만, 그것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 안에서 그리했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와 나란히 예수를 따로 예배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를 주로 모신 이들은 예수 때문에 다른 모든 우상, 예수와 겨루는 다른 모든 ‘주’를 버리게 된다. 무엇보다 예수는 온 세상의 참된 주로 당신의 나라에 오셨다. 당시에 예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던 바울의 벗들은 바로 그 점을 강조했다. 예수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노예로 사로잡았던 어둠의 세력들이 지닌 힘을 박살내고자 무거운 세상 죄를 짊어진 채 죽임을 당하셨다. 이를 통해 오래전부터 내려온 약속을 이루신 예수는 “우리 범죄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일으켜지”셨다. 예수는 셋째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몸으로 부활하심으로써, 그가 누가 봐도 틀림없는 참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메시아요, 이스라엘의 대표자이시며, 몸으로 나타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이… ‘예’가 되신” 분이요, “율법의 목표”이며, 아브라함의 참된 씨이자, 궁극적 “이새의 뿌리”다.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며, 모든 이가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예수는 미래에 있을 큰 사건 때 다시 나타나실 것인즉, 이 사건은 참된 왕이 당신 나라의 소유권을 주장하시고 그 나라를 세우셨음을 깨닫게 함과 동시에 오랫동안 감춰져 왔던 하나님이 마침내 그 모습을 나타내셨음을 깨닫게 할 것이다.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당신 백성을 부활시키실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인 현재도 그 강력한 메시지로 인생을 변화시키실 수 있으며 실제로 변화시키셨다.
예수는 살아 계시고,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으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경고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존재이시다. 그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밀어붙이시는” 분이요,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주신” 분이다.
예수는 출발점이셨다. 그리고 그는 다다를 목표다.
목표? 그렇다. 예수가 목표인 이유는 바울이 그가 다시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 저 ‘하늘’이 ‘우리 위에 있는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현재 실재하시는 차원임을 되새겨야만 한다. 예수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는 목적은—대중에게 인기 있는 판타지 속에 많이 등장하는 내용처럼—그의 백성을 따로 떼어내 ‘하늘’로 다시 데려가려 함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일, 곧 인간의 영역인 ‘땅’에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의 삶을 이식하는 일을 완결하려 함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었으며, 그 계획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이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곧 하늘과 땅을 모두 아우르는 곳인 궁극의 성전이심을 의미했다. 예수가 그 자신을 통해 몸소 이미 이루신 이 일은 이제 그의 영을 통해 실행되고 있다. 바울은 늘 하나님의 새 창조(피조 세계)가 도래할 것이며, 어쩌면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바울은 후기 서신을 쓸 무렵에 이르러, 그가 초기에 짐작했던 것과 달리,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타락하고 썩어 가는 현세가 언젠가는 이 노예 상태, 이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백성, 하나님이 지으신 새 인류의 영광스러운 통치 아래 새로운 생명으로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벨론 유수 때 성전을 떠나시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강력한 영광 가운데서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시지 않았지만, 갑자기 모든 인간을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며 예수 안에서 당신을 나타내사 미처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 세상과 사람들 속으로 뚫고 들어오셨다고 믿었다. 바울은 이런 일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 그리고 영이 선물로 주어진 사건 때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사례에서도, 그리고 어쩌면 다른 이들의 사례에서도 순식간에 사람 눈을 멀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영광 가운데서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는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미래에 완성되리라고 믿었다. 아울러 그는 예수가 죽고 부활했을 때 위대한 변화가 온 우주에서 일어났다고 믿었으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 또는 ‘다시 나타나실’ 때, 하늘과 땅이 마침내 하나가 될 그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그 사건이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시간 틀 안에서 일어나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한 세대 안에 일어난다던 사건은 세상의 끝이 아니었다. 그 사건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그는 그런 대재앙이 닥치기 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우러진 공동체, 한 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그리고 영의 능력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를 세우고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야만, 일어날 수도 있는 이런 분열을—이런 분열은 물론이요, 고린도전서 3장과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새 성전’의 몰락도—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서신을 쓸 때마다 이 서신 저 서신에서 교회가 모든 민족의 경계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이유였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 품은 소망의 중심 특징이라 여기는 것들을 강조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 이스라엘의 메시아, 그리고 부활 자체였다. 바울이 중요시한 것은 메시아 종말론messianic eschatology 그리고 그 종말론을 구현한 공동체였다.
한 분 하나님이 개개 약속들의 총체뿐 아니라, 하나님의 옛 백성에 관한 모든 내러티브를 다 이루시되 아주 뜻밖의 방식으로 이루셨다. 그 바람에 약속의 수호자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그것은 바울이 이 회당 저 회당에서 이야기해 오던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루신 덕분에 이제 이방인이 한 가족에 편입되고 있었다.
바울이 첫날들을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했음을 의미했다. 이 첫날들은 하늘과 땅이 토라와 성전이 아니라 예수와 영을 통해 하나가 된 새로운 세계사 드라마 속의 첫 장면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온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버릴 미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메시아요 주이신 예수, 그리고 그 결과로서 유대인의 소망이 갖게 된 새로운 형상이 철두철미하게 바울의 동기와 사고방식을 형성한 중심이었다.
바울은 늘 한 분 하나님이 마지막에 온 세상을 바로잡으시리라고 믿었다. 바울은 그 일이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고—그리고 그가 다시 오실 때 일어나리라고—선언했다. 먼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 세상을 바로잡는 일을 실행하셨고 예수가 다시 오실 때 이 일을 마침내 완성하실 하나님은 그 사이에 능력이 넘치고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당신의 영을 주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첫 장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그 왕 안에서 온 우주를, 그렇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역설한다. 그는 이 서신 2장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 구원받음”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하도록 왕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일은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로, 그분이 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또는 이 그리스어 본문의 맛을 색다르면서도 입에 감기게 살려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술작품입니다”로 옮겨 볼 수도 있겠다. 하나님은 새 창조를 메시아 안에서 그리고 영을 통해 이루셨으며, 이루실 것이다. 복음을 믿고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발견하는 사람은, 비록 작아도 그 새 창조를 생생히 보여 주는 중요한 실물 모델이 된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형상을 가진 자가 되는 것,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를 이 세상 속에 되비치며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찬미를 되비쳐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성전 속에 있는 한 ‘이미지’처럼—하늘과 땅의 문턱에 서 있도록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생명을 온 땅으로 흘려보내고 온 땅이 올리는 찬미가 하나님께 올라가게 하는 통로가 되게 지음 받았다. 따라서 여기에 인간 구조rescue와 갱신(전통 언어로 표현하면 ‘구원’)을 바라보는 바울 시각의 핵심이 있다. 즉 복음 안에서 은혜에 붙잡히고 한 분 하나님을 성실히 믿으면서 예수께 초점을 맞춰 그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누리는 수혜자일 뿐 아니라, 그 자비를 전하는 대리자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당신이 지으신 이 세계에 들려주시는 시다. 그런 사람은, 본디 시가 하는 것처럼, 사물을 보는 기존 방식을 깨부수고 열어 인간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온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이다. 그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그 일 가운데 큰 작업을 마치셨다. 이제 하나님은 복음과 영을 통해 사람들을 바로잡으심으로써, 이 사람들이 복음이 행하는 일의 본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세계를 더 깊이 있게 변화시켜 가는 대리인이 되게 하신다. 이것이 바울의 유명한 ‘칭의론’의 핵심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되비치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보는 소명의 틀vocational framework, 그리고 인간이 바로 그런 소명을 행할 수 있게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는 구조 작전과 관련이 있다.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어 준 예수의 죽음, 예수 자신이 새로운 유월절이심을 보여 주신 그 죽음의 목적은 인간이 본디 그들 소유였던 권위를 넘겨준 강력한 ‘신들’과 ‘주主들’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부활이 그것을 증명했으며, 이를 통해 참 하나님을 새 세상에 되비쳐 줄 새 세상과 새 백성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시편 2편의 약속—하나님이 그가 기름 부으신 왕을 세상 모든 민족의 통치자들 위에 세우심으로, 아브라함에게 그가 받을 ‘유업’과 관련하여 주셨던 약속을 세상 모든 구석에 미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메시아 안에서 실현되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바울은 그 배경도 각양각색인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 존재함을 이 세상에 증언하는 한 가족이 존재한다.
바울의 특별한 소명은 이방인의 땅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우러진 교회를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막는 자’가 금세 다가올 엄청난 격변을 여전히 제지하는 동안에 그 일을 하는 것이었다.
성경에 비춰 기도하고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신자들이 새로워지고 변화된 생각을 가질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바울이 미처 시간이 없어 그들에게 일러 주지 아니한 일도 행할 수 있게 해야 했다. ‘메시아의 마음’, 특히 십자가 이야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음을 품고 생각할 방법을 가르쳐야 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여러분이 메시아 예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지니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가 되거나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둘은 모두 명령이었다. 그러나 지키기가 아주 어려운 명령이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메시아 안에’ 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생각을 포로로 사로잡아 메시아께 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이라는 말로 정의했다. 메시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오직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는 그 사랑이라는 빚이 그를 예수 바로 그분과 맺은 풍성하고 친밀한 관계 속에 묶어 두었다(“그를 알고, 그 부활의 능력을 알며, 그 고난에 동참함을 앎”10). 행동으로 드러낸 사랑!
하나님의 빛을 이방인에게 가져갈 종과 이 종이 겪어야 할 고초—이 고초에는 자신의 일이 정말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하는 의심도 들어 있었다—를 내다본 이사야의 환상은 바울과 늘 함께했다. 이것이 바울을 움직인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피스티스pistis는 ‘믿음’(faith, 이 단어는 영어에서도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그 모든 의미가 다양한 지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충성’이나 ‘신뢰할 수 있음’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바울은 칭의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아브라함이 약속받았던 단일 가족의 식구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선언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의로 여겨졌다”라는 말을 이제는 이 이방인들이 듣게 되었다. 그들은 언약의 구성원이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그들의 피스티스를 보고 그들이 언약 가족의 식구임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피스티스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하나님을 믿음”이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제의 ‘믿음’은 한 인간 전체가 복음 전체에 보이는 반응이다. 이는 전통적 라틴어 표현을 빌리면, 피데스 쿠아fides qua(믿음의 행위)일 수 있다. 즉 인간이 믿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믿음the faith by which one believes, 인간이 실제로 드러내는 신뢰, 한 인간이 그 인격 전체로 복음의 메시지에 보이는 반응을 의미할 수 있다. 아니면 그것은 인간이 믿는 믿음을 의미하는 피데스 쿠아이fides quae(믿음의 내용), 곧 한 인간이 동의하는 특정한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의’는 어디까지나 믿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복음은 단지 어떤 정신 반응, 어떤 계산, 어떤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동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 하나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생각과 마음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충성’이 피스티스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인 이유다. ‘믿음을 보이는 순종’—더 널리 쓰는 번역으로 표현하면 ‘믿음의 순종’—은 예수를 전하는 메시지에 마음을 다하고 인격을 다해 충성함을 보이는 반응이다.
실체가 오면, 이정표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정표가 길을 잘못 안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오셨다면,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심으로 그가 메시아임을 밝히셨다면, 충실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 메시아에게 성실을 다하고 이 메시아 안에서 그리고 이 메시아를 통해 행동하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이라는 패턴을 따라감을 의미했다.
세례를 받은 이는 이제 ‘메시아 안에’ 있으며, 민족을 초월한 대가족의 한 식구가 되었다. 아울러 메시아에게 진실인 일(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이 그에게도 진실이 되었다. 바로 이곳이 ‘산정’(여김)이라는 행위가 속한 곳이며, 후대 교의는 이 계산에 ‘전가’라는 의미를 덧입혔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들 자신을 죄를 향해 죽은 자로 산정하고(여기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자로 산정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에게 진실인 일이 그들에게도 진실이라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그 진실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들은 이미 ‘그분 안에서’ 부활했다. 그런 그들이 언젠가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삶 전체를 이 빛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보통 말하는 의미의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존재하면, 이 믿음은 사실 충성, 곧 메시아께 다하는 충성, 메시아를 통해 한 분 하나님께 다하는 충성과 구분할 수 없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이 한 분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 어둠의 권세들을 격파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당신의 영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신실하고 고난을 무릅쓰며 기도와 함께하는 예수 따름이들의 증언을 통해—온 세계에 널리 퍼뜨리시리라고 기대해야 한다.
한 분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새 성전, 당신의 새 소우주를 세우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우러진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우리 가운데 들어와 사시는 장소요, 장차 온 세상에 걸쳐 일어날 일을 미리 일러 주는 표지로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장소다. 따라서 이 운동은 조만간 흥왕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 온 우주를 아우르는 의미를 지닌 무슨 일이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고 역설하곤 했다. 이 운동은 그저 제멋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운동은 어떤 왕성한 작용과 역사 속의 기회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부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뜻과 에너지를 만들어 내시고자 당신 백성 가운데서 일하신다. 이는, 조만간 그리고 무슨 수단을 통해서든 더 큰 효과를 만들어 내게 된다.
바울은 은혜가 역사할 때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이라는 대리자도, 특히 기도할 때에, 열심히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곤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 자신이 그런 경우라고 말한다. 창조주는 갖가지 방법으로 일하시지만,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방법이 사람—생각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사람, 특히 기도하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심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 순전한 에너지
2) 누구든지 그를 비판하고 대적하는 이를 만나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기탄없이 흉금을 터놓고 말하는 그의 습관
바울은 자신의 마음이 넓게 열려 있으며 교회를 향한 그의 애정은 무한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진실이다. 그의 정직함은 해처럼 빛난다. 바울은 우리가 보는 모습이 그의 본모습이다. 설령 우리가 원하지 않은 모습일지라도 그것이 그의 진짜 모습이다. 그는 숨기는 구석이 없다.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을 위해 무언가를 하리란 것을 다 안다. (그가 늘 말하듯이) 하나님이 메시아 안에서 그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무시무시한 고난과 고초를 비롯하여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른 이에게 요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것의 본을 보였는데, 지극하고 풍성하며 자신을 내어 주는 메시아의 사랑이 바로 그가 가르친 것이었다.
그가 시작한 이 이상한 운동이 이후에 흥왕하게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의 동역자 대다수가 바울 자신에게 열렬히 충실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렇게 하여 일이 다 이루어졌으며, 그렇게 하여 그가 시작한 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제시한 그림은 이스라엘 고대사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유대다운Jewish 모습을 확고히 간직한 그림이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그 중심에 있었으며, 세계 열방과 그들의 가장 훌륭한 사상이 메시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일을 이루었다.
복음을 열렬히 변호하고 이단을 공격하려는 젊은 개혁자 시절에는 갈라디아서와 동행하고, 어른이 되어 슬프게도 세상일이란 것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혼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고린도후서와 함께하며, 마지막에는,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그 어떤 것도 “왕이신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되새겨 주는 로마서와 동행한다.
성공을 거둔 이유를 묻는다면, 그가 남긴 이 서신이 사람을 절박하게 몰아치는 내용에서 다정하게 끌어당기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예언자의 예언 같은 내용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지성에서 열정이 넘치는 변호에 이르기까지, 아주 폭넓은 내용을 아우른다는 점이 그 대답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무엇을 생각하느냐뿐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서신을 쓸 때마다 한 가족을 이룬 신자들의 삶을 강조한다. 그는 한 가족을 이룬 이 신자들을 ‘교회’, 곧 에클레시아ekklēsia라 부르기 시작하며, 이후 세대도 보통 이를 ‘교회’라 부르게 된다. 그가 거듭 교회의 통일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 아니 아예 대담하게 말해 본다면, 새로운 종류의 ‘정치’와 관련 있다. 정치는 폴리스polis—도시, 공동체—와 관련이 있으며, 이 폴리스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운영되는지와 관련이 있다.
바울은 로마 황제와 다른 퀴리오스에게 충성하는 색다른 공동체상을 제시했고, 통일에 관하여 다른 시각을 제시했으며, 색다른 종류의 다양성을 주장했다. 통일과 다양성은 바울은 물론이요, 개개 공동체(교회를 단일하나 아주 다양한 지체를 지닌 메시아의 ‘몸’으로 본 바울의 시각 때문에 도전을 받았던 고린도 교회 같은 공동체)와 온 세상을 아우르는 ‘가족’(바울의 연보 모금 사업에서 도전을 받은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 같은 교회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점이었다.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들에게 그들이 이 위대한 전통에 접붙여졌음을 늘 설명하곤 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임을 주장했다. 그 나름의 역사와 변천을 거쳐 온 어떤 정치 실체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이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더 큰 세계를 내다보는 시각을 어렴풋이나마 맛보고 있었다.
바울이 통일을 강조한 것은 또 다른 사회 현실과 문화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을, 그들을 지켜보던 세계에 예수가 주요 로마 황제는 주가 아님을 선포할 힘을 갖고 있었으며, 바울도 십중팔구는 그 점을 인식했다.
예수 따름이를 독려하여 그들이 인간에게 새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 사회를 어렴풋이나마 맛보고 실제로 만들어 가게 하는 데 다시금 사용되고 있었다.
바울의 공동체가 본질상 외부를 향한 공동체였으며 밖을 향한 그들의 얼굴은 외부 사람들을 적극 돌보는 얼굴이었다는 사실.
복음 자체는 새로운 종류의 백성,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려 했다. 실제로 복음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종류의 인류는 “선한 일”이라는 특별한 목적을 이루고자 창조되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공동체가 평상시에 하는 행위를 통해 그 주위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동체가 품었던 꿈은 각자가 모든 이를 위해 일하고 모든 이가 각자를 위해 일하는 사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코이노니아koinōnia, 곧 ‘사귐’이라 부르기도 하는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 가족을 제시한 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모든 어둠의 권세에 승리를 거두셨다는 그들의 믿음을 종종 강조했다. 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길에서, 집에서, 장터에서, 이전과 다른 주를 따르고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 주었다.
만물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예수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바울의 시각은 이 모든 철학에 도전을 던져 그 철학 자신의 방법으로 그 철학을 다 격파할 수 있었다.
바울이 이스라엘과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3중 전통을 충실히 파고들어 이들 전부를 예수와 영(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예수와 이스라엘이 품었던 궁극의 소망인 부활의 중개자인 영)의 형상으로 바꿔 놓은 것이 후대에 나온 위대한 사상가들의 활동 지반을 제공했다.
신학은 건강한 교회의 척추다.
교회가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살아남고 번성한 것은 바울이 그 제자들에게 생각할 대상(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뿐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을 가르치며 이룩한 성과 덕분이다. 바울은 그것에 어떤 대가가 따르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지만,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진정 인간의 길이요, 진정한 인간다움이 지닌 힘을 통해 승리를 거둘 길이라고 믿었다.
바울 자신이 품었던 꿈은 통일되고 거룩하며 외부를 바라보는 교회였다. 그는 고난 받는 사도직(사도의 길)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선구자였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의 메시지가 고난 받는 사도를 통해 펼쳐지고 이 세상에서 효험을 발휘했다.
바울이 품었던 꿈, 곧 옛 이스라엘을 다룬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늘 기도하며,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사회와 정치에 맞서면서도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한 이에게 선을 행하는, 통일되고 거룩한 공동체가 늘 중심을 이룰 것이다.
교회가 신학 작업은 물론이요 바울과 그 동료들의 작품에 뿌리를 둔 주해 작업을 포기할 때, 교회의 통일과 거룩함,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돌봄 역시 밖으로 밀려날 것이며,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죽음을 늘 준비한 점,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그가 살아간 삶과 관련하여 다가왔다는 점, 그리고 특히 그가 늘 올렸던 기도를 우리 시선에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한 분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니, 그분에게서 만물이 비롯되고, 우리는 그분을 향해 삽니다)과 한 주(메시아 예수가 계시니,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존재하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삽니다)가 계시니, 여러분은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Heis theos, ho patēr, ex hou ta panta kai hēmeis eis auton,
Kai heis kyrios, Iēsous Christos, di’hou ta panta kai hēmeis di’ autou.
그가 평생에 걸쳐 한 일은 하나님나라 그리고 주이신 예수를 누구에게나 드러내 놓고 거침없이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는 처형자가 그 칼을 뽑은 지금도 기도하며 그 일을 한다. 그는 이 한 분 하나님을 그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사랑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목숨까지 바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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