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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서적/세이빙 다빈치-낸시 피어시

2. 진리와 독재/1부 세속주의의 전 세계적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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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한 가지 실재(우리가 아는 것)를 정의하고, 믿음은 또 다른 실재(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를 정의한다."-리사 밀러「뉴스위크」종교담당 편집장-












만만한 표적

경험주의는 보고 듣고 만지고 무게를 달고 길이를 측정하는 인간의 감각이 모든 지식의 근원이라는 신조다. 그런데 도덕적 진리는 시험관에 넣거나 현미경을 사용하여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사상가들은 도덕적 진술을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감정의 표현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 데이비드 흄: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가(1711-1776). 로크의 경험론적 인식론을 계승해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 종래의 형이상학을 적극 비판, 실체나 인과 따위의 관념은 심리적 연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역사가로서는 계몽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데이비드 흄은 지식의 궁극적 근거가 감각경험이라면, 도덕도 고통이나 쾌락 같은 감각경험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모종의 쾌락을 주는 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고통을 주는 것을 "악하다"고 말한다. 흄의 표현을 빌면, 도덕은 "취향과 감정"의 문제다.
흄이 도덕을 개인의 취향으로 환원시킨 것은 서구 사상의 진로를 바꾸어 놓은 첫걸음이었다. 그는 전통 철학을 대립되는 두 개의 범주로 분리시켰다. 진리는 포괄적인 전체로서 자연 질서와 도덕 질서를 아우른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었는데, 흄은 이 둘을 찢어 버렸다. 경험주의에 따르면 자연 질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으로, 진정한 지식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나 도덕 질서는 감각을 통해 인식되지 않으므로 주관적 감정으로 치부되었다. 사람들이 초월적 진리로 여겼던 위대한 도덕적 원리들이 사실은 진리가 아니라 선호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도덕의 궁극적 원천이었던 종교 역시 신뢰를 잃었다. 경험주의 등장과 더불어 종교는 사적 감정이요, 감정적 위안으로 치부되었다. 통합적이고 일관성 있는 세계관이라는 진리 개념은 산산이 부서졌다.
진리의 분열은 흔히 사실/가치의 분리라고도 한다. 객관적 지식은 경험적 사실의 영역에서만 가능하고, 도덕과 종교는 주관적 가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흄의 경험주의 철학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전해져서 세계화된 세속주의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었다.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분리는 근대 서구 정신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로마에 저항하기

만물은 단일한 신적 지성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로 인해 모든 진리는단일하고 조리 있고 일관된 체계를 형성한다. 진리는 통합적이고 보편적이다.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질서정연한 우주로 통합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요 1:1). 요한이 그리스도가 우주의 질서와 일관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골 1:17)한다.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반영하는 이성적이고 이해 가능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진리의 렌즈를 통해 정부, 경제, 과학, 경영, 예술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계관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대의 용어를 사용해 성경의 포괄적 주장을 재진술하는 것에 불과하다.


햄릿과 해리포터



세속마을의 영성

대부분의 사람이 파편화된 삶을 살아간다. 가정, 교회, 친구와 같은 사적 세계에서는 노동, 기업, 정치 같은 공적 세계에서 사용하는 진리관(객관적 가치)과 전혀 다른 진리관(주관적 가치)에 의거해 행동한다. 사실과 가치의 대립은 일관성 있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다.


예수를 믿는 상대주의자들

분열된 진리 개념은 "두 마음을 품어"(약 1:8) 모든 행동이 불안정한 젊은이들을 만들어 낸다.
진리를 성경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어떻게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다룰 수 있겟는가?(딤후 2:15)


그리스도인은 독선적인가?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이 객관적 진리라는 확신을 잃게 되면, 젊은이들에게 옳은 것을 믿고 실천하게 하는 방법은 그들을 구슬리고 달래는 것밖에 없다. 기독교가 실제 세계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오래 참으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인가

상대주의적 종교관은 어떤 전통 종교 못지않게 배타적이다.


C. S. 루이스: "둘 다 옳을 수는없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신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요일 3:20) 하나님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인간이 필요해서 만들어 낸 적이 없는 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 진리 주장을 배제하여 반증당할 우려를 없애려는 전략은 자기 파괴적이다.


자유주의자들의 굴복

성경적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과 영적 의미를 분리하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셨고, 특히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행하셔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기독교는 유일무이한 종교다.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경험적 조사로 진위 확인이 가능했으며, 통상적인 역사 확인 방법으로 진실임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부활을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적인 실험 비슷한 것으로, 곧 하나의 이론 전체(혹은 신학 전체)를 확증하거나 반증하는 사건으로 취급했다. 그들에게 역사적 사실과 영적 진리는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다. 사실과 믿음이 서로를 지지했다. 진리는 하나의 통일체다.


자유주의 교회가 실패하는 이유

정통 기독교 교리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객관적으로 참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교회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자유주의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는 주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선포할 강력한 진리, 곧 '복음'이 없다"
성경 메시지의 힘은 그것이 실제로 참되다는 사실, 객관적. 보편적. 우주적으로 참되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그것은 단순한 심리적 대응 기제가 아니다. 서구 문화가 낳은 사회학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자체에 대한 진리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 성장의 원천이다.
우리는 전 존재로 하나님의 진리와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전인적으로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막 12:30). 하지만 이 조화로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당대를 지배하는 오류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특징적인 오류는 진리의 분열이다.


교실에서 성경 몰아내기

사실/가치의 분리는 공공의 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주변으로 몰아내고 그들의 영향력을 빼앗는 주요 전략이기도 하다.
현대의 두드런진 특징은 진리의 통일성이라는 이상이 산산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종교로부터 보호하라

사실/가치의 이원론은 표적 집단의 사회적. 정치적 힘을 빼앗는 효과를 발휘한다.


착한 경찰 VS 나쁜 경찰

기독교가 "도덕적 시와 위로의 이야기"로 취급되는 한, 세속주의의 통치권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잘 길들여져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확고하고 온전한 진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기독교가 감정을 표현하게 해주고 위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실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억압적 관용

진정한 관용과 자유를 위해서는 진리를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행태에 문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분열된 진리 개념을 고수하는 이들은 흔히 자신이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편협하고 제한되고 세속적이며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진리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진리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 교회와 사회 모두의 갱생을 위한 열쇠다.


세속적 바리새인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바리새인처럼(눅 18:11), 모든 집단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지점을 내세우며 남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관용과 겸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매우 도덕주의적이고 비판의 태도를 부추긴다.
결론은, 실생활에서 사실/가치의 이분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슬로건

세계관 개념은 '통합'(이 용어는 '온전함'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했다)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갈망을 표현한다.
종교개혁이 제시하는 두드러진 통찰은 기독교가 개인과 평신도 조직의 활동을 통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개인과 평신도 조직은 교회의 보살핌과 가르침은 받지만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진다. 이것이 코람데오(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하는 종교개혁 원리의 의미다. 교회는 성경적 세계관으로 개인을 준비시키고, 전선으로 내보내 성경적 진리의 토대 위에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돕는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멋진 창조력의 향연이다.


세속주의자들에게 다가가기

사람들에게 성경의 메시지가 진리라는 확신을 주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떤 진리를 말하고 있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고 있는 사실/가치의 이분법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주의자들이 구사하는 작전을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전략에 맞서고 세속적인 사람들과 보다 효과적으로 대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시야를 넓혀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분열된 진리 개념이 세계화된 세속적 세계관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모든 진리관(인식론)은 실재관(형이상학)과 이어져 있다.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은 이원론적 인간관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낙태, 안락사, 성 같은 영역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